[정진오 칼럼]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에게 듣는다 (16)

목회·신학
신학
편집부 기자
news@cdaily.co.kr
  •   
십자가의 길: 하이델베르크 논쟁(1518)

■ <논제 14>  : 타락 이후 "자유의지"는 단지 수동적인 능력(passive capacity) 안에서만 선을 행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능동적인 능력(active capacity) 안에서는 악을 행하게 된다.

▲정진오 목사(미국 시온루터교회 한인 담당목사)

 "다음의 예가 이 논제의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죽은 자(dead man)가 단지 수동적인 능력 안에서만 삶에 대해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능동적인 방식을 통해 죽음을 향해 어떤 것을 행한다. 자유의지는 죽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일으키시는 죽은 자들에 의해, 그리고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을 통해 입증되었다. 나아가 어거스틴은 펠라기안(Pelagians)에 반대한 그의 다양한 저술을 통해 이와 동일한 논제들을 입증했다."(LW 31:49)

루터는 앞선 <논제 13>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설령 인간이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행한 모든 것들도 "죽음에 이르는 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질문이 남는다: 만일 자유의지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인간 안에 있는 의지의 능력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 안에 어떤 의지의 힘이 있지 않은가? 그 의지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논제 14>는 이러한 질문과 함께 인간 안에 있는 의지의 능력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진술한다. <논제 14>에서 루터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주의(Aristotelian Scholasticism)의 중요한 교리들 중의 하나인 수동적 능력(passive capacity)능동적 능력(Active capacity)에 관한 이론을 사용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의지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욕구'(orexis) 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De anima) 3권에서 욕구는 영혼 안에 있는 일종의 능력으로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욕구라 불리 우는 것들은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영혼 안에 있는 일종의 능력이다." (De Anima iii 10, 433a31-b1).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욕구를 욕구의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으로 규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에 기초하여 '의지'를 "이성적 욕구"로 정의하면서, 의지는 '무언가를 지향하는'(for the sake of something) 인간 영혼에 속하는 능력(potential)이라고 설명한다. 즉 능력으로서의 의지가 어떻게 원욕(願慾: velle, wollen)이라는 활동으로 현실화되는가의 문제이다. 이렇게 의지를 운동이라는 개념과 결부 짓는다면, 필연적으로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운동은 언제나 운동시키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의 관계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동적 의지 개념과 기독교의 근본 신앙인 의지의 자유를 조화시키고자 했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을 따라 신은 사랑이라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틀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리인 의지의 자유를 어떻게 옹호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의지의 내적 활동(actus interior)과 외적 활동(actus exterior)을 구분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내적 활동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활동이며, 외적 활동은 외적 행동으로 드러난다. 의지의 내적 활동에 있어서 의지는 움직여지는 자이고, 하나님은 원동자(原動者)운동시키는 자로 이해된다. 이 때 의지는 하나님의 작용에 대한 수동적 관계로 규정된다. 반면에 의지의 외적 활동에 있어서 의지는 하나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여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스스로 움직이는 자이다. 이 때 의지는 능동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 안에는 두 가지 활동이 있다. 첫째는 의지의 내적 활동이다. 이와 연관하여 의지는 움직여지는 것이며, 하나님은 움직이는 자(mover)이다. 특별히 지금까지 악을 행하고자 했던 의지가 선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 둘째는 의지의 외적 활동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의지는 이 외적 활동에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이 외적 활동의 작용은 의지로부터 기인한다."(S.Th, I-II,q.111.a.2)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간 의지는 악에서 마음을 돌려 선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은 내적 활동으로 여기서 인간 의지는 수동적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구체적인 외적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하나님의 의지뿐만 아니라 인간도 능동적 원인자로 참여하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 의지는 능동적이다. 결과적으로 아퀴나스는 인간의 자유의자가 작용하여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런 선행을 통해서 은혜의 증가를 얻을 수 있는 공로(merit)를 쌓게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루터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주의가 말하는 인간 의지의 수동적 능력(passive capacity)과 능동적 능력(active capacity)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그 의미를 설명한다.

아퀴나스가 인간이 자유의지의 능동적 능력을 갖고 있고, 이 능동적 능력을 통해 스스로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을 쌓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루터는 인간 안에는 구원에 이르는 선한 행위를 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내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외부로부터 오는 신적인 힘에 의해서만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이 의지의 능동적 능력인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은 언제나 악을 행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한 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는 외부로부터 오는 신적인 힘에 의해서만 구원에 이르는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루터는 인간 의지는 언제나 수동적 능력 안에서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는 이러한 자신의 신학적 주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죽은 자에 대한 유비를 말한다.

죽은 자(dead man)는 삶에 대해 오직 수동적 능력만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스스로 죽음으로부터 일어 설수 없다. 죽은 자에게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 수 있는 어떤 능동적인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죽은 자는 스스로 다시 일어 설수 없다. 그것은 오직 외부로부터 오는 신적인 힘을 통해서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이것은 죽은 자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힘과 외부로부터 오는 신적인 힘의 협력이 아니라, 오직 신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수동적 능력이다. 반면에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동적 능력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생명을 창조하거나 생명을 줄 수 없다.

루터는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았다. 죽은 의지는 스스로 일어 설 수 없다.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힘도 남아있지 않다. 오직 외부로부터 오는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cia)로만 가능하다.

루터는 어거스틴 또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이와 동일한 논제를 입증했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본성과 은혜에 관한 논제 - 펠라기우스에 반대하여" (A Treatise on Nature and Grace, Against Pelagius)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를 타락시키게 만든 자유의지는 죄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의(righteousness)로 돌이키기 위해, 인간은 의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죽었기 때문에 생명을 주시는 분을 필요로 한다. 지금 이 같은 은혜를 그(펠라기우스)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치료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도리어 인간을 파멸시칼 뿐이다." (A Treatise on Nature and Grace, Against Pelagius, Ch. 25)

따라서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에 대하여 능동적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수동적 능력만을 갖는다. 이것은 구원 받을 수 있지만, 스스로 구원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 받기 위하여, "외부"(from without)로부터 오는 신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된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루터의 이러한 담대한 신학적 주장들은 <논제 15>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진술된다.

■ 정진오 목사는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이메일(jjeong@zionbelleville.org)로 하면 된다.

#정진오목사 #정진오칼럼 #종교개혁500주년 #하이델베르크논쟁 #십자가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