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대림동은 ‘한국의 작은 중국’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 교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한국에 가면 돈을 한 몫 쥘 수 있다는 단순한 희망을 안고 한국에 왔으나 돌발적인 변수가 생겨 고생하는 교포들도 다수이다.
그들을 보듬고 선교의 기치를 들고 교포 선교에 뛰어 들었으나 여러 장애 요인으로 선교가 맥을 못 추고 있을 때 북한 선교의 꿈을 안고기도 하다가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 온 분이 있었으니 바로 김종덕 목사이다.
그는 일찍이 한국 교회의 분열의 상처로 신음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기도 하던 중 교단도 다르고 신학의 색깔도 다른 목회자를 영입하여 연합의 기치를 들고 강남에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는 중견 목회자이다.
그 분이 중국 교포들은 북한에 자유 왕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곳에 찾아 온 것이 다문화선교센터의 시작이다.
먼저 대화 중 공통점을 발견하고 양 교회가 협력하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 번 교인들의 반대로 무산이 되고 필자는 조금 일찍 은퇴를 선언 한 후 센터에 몸을 담게 된다.
필자가 오기 전 선교 중심의 조직을 꾸미고 열심히 운영하였으나 어려움에 있던 차에 필지가 오게 되니 요셉 시대의 애굽 왕처럼 모든 것을 필자에게 맡기고 한 달에 한두 번 설교만 하고 간다.
신뢰하고 믿어주는 마음에 감동하여 필자는 몸이 부서져라 섬기니 소문이 나서 이제는 매일 같이 중국의 한족들과 부부 교포들의 입주 문의가 폭주하고 있다.
마침 주일 학교 때 선생님으로 들었던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 떠오른다. 뒤러(durer)의 ‘기도 하는 손’은 참으로 보는 사람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고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누구든지 그림을 앞에 두면 마음으로 가다듬게 되고 그 손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손으로 느껴진다.
뒤러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화가의 수업을 받게 된다. 그러나 너무 가난하여 두 사람 모두 함께 화가의 길을 가기에는 매우 어렵게 된다.
생각 끝에 그 친구는 그림의 재능은 자기보다 뛰어난 뒤러로 하여금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고 자신은 노동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후일 친구의 손을 만져본 뒤러는 거칠어진 손을 만져 보고 가슴 아프고 또 한편 그의 우정에 감사하여 그 손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 속의 손이 아니라 친구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사랑과 노력이 깃든 손으로 아직도 보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그림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이토록 진실한 사랑의 친구가 되게 한 것은 저들의 종교였다.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들 마다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덕으로 채워지고 새로 워 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뒤러로 하여금 그토록 영감에 넘치는 그림을 그리게 한 친구처럼 우리도 기도한다면 세상은 악담과 저주로 더럽혀지지 않고 살기에 넉넉하고 마음을 열어놓고 살 만 한 삶을 담아 주는 살고 싶은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세계의 2위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회사가 부도 날 위기에 그러잖아도 실업난으로 젊은 청년들이 실의 빠져 있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작업 하던 비정규직 근로자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단면과 삶의 각 박 함을 들어내 주고 있다.
교회는 개척 교회들과 농어촌의 어려운 교회들의 어려움을 서로 보듬어 주는 뒤러의 정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라 믿는다.
마태복음 6장8절에 ‘하나님께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다.
무엇을 달라는 시끄러운 기도보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 더욱 아쉬워 진다는 것은 ‘죽은 돌’이요, 자기를 찾아오는 객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줄 수 없다면 ‘죽은 돌이 되는 법’. 한국 교회는 등치 큰 죽은 돌이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지나가는 과객에게 생수를 공급하는 ‘산돌’인가 주님의 물음에 답해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여 “쓸모 있는 돌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