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한경직(韓景職, 1902년 12월 29일~2000년 4월 19일)목사님은 대한민국의 장로교 목회자, 교육자. 애국지사이시다. 1902년 12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부친 한도풍(韓道豊)씨와 모친 청주이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추양(秋陽),1914년 김찬빈 사모(김병삼(金炳三의 딸,1899-1974,3세 연상)와 결혼, 슬하에 딸 한순희(1918년)권사와 아들 한혜원(1938년)목사가 있다.
2000년 4월 19일 영락교회 내 사택에서 향년 98세로 소천. ✱은퇴 후 25년간 거주하신 남한산성 우거처에서 2000년 초 노환으로 영락교회 내 사택으로 옮겨 가료중 소천. 2000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장(葬)으로 영락공원묘지에 안장되셨다.
학력
1916 진광소학교 졸업. 1919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1925평안남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1926 미국 엠포리아대학교 졸업(인문과학 전공). 1929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신학석사). 1948 미국 엠포리아대학 명예신학박사 학위 취득. 1956 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학위 취득. 1977 숭실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 취득 등 당시 최고 학벌 소유자중의 한분이셨다.
목회
1933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 평북 의산노회(중국 안동제1교회에서 개최)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로 시무. 1935 신의주 매지동 6번지에 건평 360평의 2층 교회당 건축. 1942 유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목회지에서 추방,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 부양사역에 전념. 해방 후 북한을 탈출하여 1945년 12월 2일 서울 영락동 소재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입수, 베다니 전도교회 설립(영락교회의 전신, 주로 월남한 북한 피난민 중심)
27명으로 시작한 이 교회는 창립 1년 만에 1500명으로 급성장. 1946년 11월 교회 명칭을 영락교회로 개칭). 1947년 한국에서 최초로 2부 예배 실시. 1949. 당시 교인이 6,000명으로 증가. 1949년 말, 여수반란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교회가 연합하여 지리산 일대에 십자군전도대를 파견. 1950. 1월 1차 전도대에 참여, 지리산 일대의 치안과 복음화에 기여함. 1949년 4500명으로 교인 급증. 1949년 말년부터 십자군 전도대를 조직, 전국 순회 전도집회 개최. 1950년 5월 350평의 2층 석조건물 교회당 완공. 1950년 6.25 동란 중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영락교회 설립. 1051년 대구영락교회 설립. 1952년 제주영락교회 설립.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40회 총회에서 총회장 피선. 1961년 영락기도원 설립. 1973년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 1960년 영락교회 1000명 한국 최대교회로 성장 1963년 한국 최초로 주일 3부 예배 시행. 1973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 1974년 예장통합 서울노회 공로목사에 추대. 이 외에도 해외선교사 파송. 산업선교. 교도소 선교. 방송선교 등 활발한 선교운동을 전개하셨다.
한경직 목사님은 월남 직후 실향민 27명을 모아 베다니교회(영락교회 전신)를 개척, 실향민들의 애환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성실하게 돌보는 목자의 심정으로 생명의 말씀과 함께 거처와 음식도 공급하는 전인구원 목회에 주력하셨기에 영락(永樂)' 교회는 월남민들을 구심점으로 그들의 안식처요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어갔다.
소수의 피난민으로 시작된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철학인 선교. 교육. 봉사. 애국의 목양이념에 적극 순응하였고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사지를 넘어 자유를 찾은 그들의 뜨거운 신앙과 기도의 열정은 한국 최대의 교회를 이루어 가면서 이방선교의 모체였던 안디옥 교회처럼 한국교회 성장과 세계선교에 동력이 되어 국내외에 500여 교회들을 세우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시키는데 공헌하는 위대한 교회가 되었다.
교육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재직. 1929 프린스톤대학교 졸업 후, 예일대학교 대학원 등록을 목전에 두고 폐결핵으로 뉴멕시코 알버커크 요양원과 덴버에서 2년 6개월 동안 투병생활. 1932년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귀국,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경교사. 숭실대학 강사역임. 1941년 유학생출신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목회지에서 추방되어,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 부양사역에 전념. 1947 학교법인 대광학원 설립 이사장 취임. 1950년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하고 이사장 취임. 1953년 영락고등공민학교 설립. 평양에 있던 모교 숭실대학을 재건하여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제6대 숭실대학 학장 역임. 1958년 학교법인 영락학원 설립, 초대 이사장 , 1962년 서울여자대학 2대 이사장 역임. 1966년 영락유치원 설립. 1967년에 숭실대학교 이사장. 1969년 영락여자신학교 설립. 1971년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 역임. 1973 아세아연합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교육으로 잠재능력을 일깨워 훌륭한 자질, 원만한 인격을 갖춘 민족의 미래지도자 양성을 위해 사람을 키워 국가의 간성과 민족의 울타리가 되게 할 목적과 특별히 신앙교육을 통한 영혼구원을 위해 각종 교육기관들을 설립하거나 기존 교육기관의 교장. 학장. 총장. 이사장직을 맡아 후학 양성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셨다.
봉사
1939년 5월 보린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수용, 후에는 양로원 추가 운영. 1941년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 부양. 1946년 농아부를 설립하여 농아인 전도부 창립예배 드림. 1947 영락 보린원 설립자 겸 원장. 1951년 6.25 동란 중 부산으로 피난하여 다비다 모자원 설립, 1952년 영락경로원 설립자 겸 원장. 1953년 서울로 복귀, 돈암동에 영락경로원 설립. 1954 영락 모자원 설립자 겸 원장. 1995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인 영락애니아의집 설립 등 복지개념이 희박한 때부터 돌봄과 섬김에 전념하셨다
한경직 목사님은 말로 설교만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경천애인을 몸소 실천하신 체휼하는 목회자셨다. 겸손한 섬김, 사랑, 희생, 나눔, 예수의 심정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불우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실행하며 사신분이다. 언제나 먹을 것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옷이 생기면 헐벗은 사람에게 입혔으며 가진 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자신은 철저히 검소한 삶을 사셨기에 땅한 평. 집 한 칸. 예금통장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셨고 애독하시던 성경과 안경. 말년에 타고 다니시던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 몇 점을 유품으로 남기심으로 가고 오는 세대의 모든 목회자들에게 수범을 보이시고 큰 귀감이 되어 주셨다.
연합
1950년 CCF(기독교 아동복지 재단)이사장. 1953년 홀트양자회 이사장. 1953년 선명회 이사장 (36년간). 1956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 1960년부터 김준곤목사. 김활란박사. 홍현설목사등과 함께 민족복음화운동 추진. 밥 피얼스. 빌리그래이엄과 같이 외국 순회전도 집회를 인도하는 폭 넓은 활동으로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대표목회자로 세계에 알려지게 됨. 1965년 아시아 전도협의회 위원장 역임. 1973년 군 복음화 후원회 회장, 전군신자화운동 전개. 1973년 빌리그레이엄 전도대회 대회장. 1973년 한국교회 진흥원 원장.1974년 엑스플로74 공동대회장. 1976년 한국 외항 선교회 명예회장.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 대회장. 1980년 세계복음화성회 대회장. 1983년 재단법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 총재.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대회장 (연인원 400만 참석)한국교회100주년 기념교회와 100주년 순교자기념관 설립. 1985년 벧엘기독교재단 이사장. 1988년 군복음화운동후원회 명예회장.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창립, 회장. 1989년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이사장. 1990년 사랑의쌀나누기운동 본부 명예회장. 1997년 (사)한국군복음화운동본부 명예회장 역임.
한경직 목사님은 영락교회를 한국 최대교회로 성장시키는데 만족하지 않고 1955년 제40회 통합 총회장과 한국기독교협의회(NCCK) 제9대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교회 연합기구들과 단체들의 교류와 교회 상호간 협력과 연합 사업을 주도 하셨고 1973년 은퇴 후에는 본격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터득하시고 다양하고 폭넓은 연합활동을 바탕으로 1970년대 한국교회 부흥의 기폭제가 되었던 여러 대중 전도집회의 중심에서 예인선 역할을 감당하셨다. 민족복음화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 전도집회. 여의도 광장의 대 성회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대 부흥을 견인하셨고. 특별히 당시 전도의 황금어장이었던 군 복음화, 전 군신자화운동에 주력하셨고 경찰선교와 외항선교에 이르기까지 동분서주 하시며 영혼구원을 위하여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일에 전력투구하셨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에 앞장서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내어 기독교의 위상을 드높이고 국가와 사회의 인정을 도출해내신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선구자이시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영락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 이루신 업적보다. 연합운동을 통해 이루신 공적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저에게 "이상형사관님, 내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소원이 두 가지가 있는데 남북의 평화통일과 한국교회를 하나로 연합하는 일입니다. 통일문제는 하나님께서 때가되면 이루시겠지만 전국교회를 하나로 연합하게 하는 일은 신신묵 목사님과 이상형 사관님이 수고하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일치를 이루고 그 힘을 구조적으로 모으기만 한다면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일궈낼 수 있을 터인데.... 전국교회를 하나로 연합하는 이 중차대한 일을 위해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해주시던 그 어른의 유언처럼 남기신 부탁을 외면할 수없이 10여 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2010년 8월 전국기독교총연합회를 조직했으나 활성화 되지 못하여 고인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한경직 목사님은 지금 천국에서 아직도 하나 되지못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애국
1945년 9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병직, 윤하영 목사와 함께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 조직 (국내 최초의 정당)하였으나 신의주 지역에 소련군 진주와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으로 1945년 10월 월남, 미 군정청 통역과 조선신학교에서 강의. 1950년 6.25 동란 피난중애도 대전에서 기독교지도자들이 모여 대한기독교구국단을 조직,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 1976년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 1984년 (재)남강문화재단 이사장 및 고려청자헌납위원회 고문에 위촉. 2008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셨다.
한경직 목사님은 개인과 민족의 수난을 온 몸으로 경험한 분이기에 여러 부문에서 민족과 사회와 역사의 아픔에 동참하시고 민족의 나아갈 진로를 제시해주는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셨기에 월남 반공 목회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셨다. 기독교 정신이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되도록 힘쓰셨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이념, 곧 '반공'과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놓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상훈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1985년 프린스톤신학대학 모교를 빛낸 영예의 동문상 수상. 1986년 세계도덕재무상(MRA) 대상 수상. 1992년 4월 29일 "노벨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 수상. 1998년 대한민국건국공로장 수훈.
한경직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사랑과 청빈을 몸소 실천하시면서 설교. 양육. 섬김. 돌봄. 나눔 등 목양뿐 아니라 수많은 복지시설과 교육기관들을 설립하여 사회복지와 인재양성에도 큰 공헌을 하셨을 뿐 아니라 격동기 대한민국의 진로와 방향을 제시해 주신 민족의 어른이셨고. 한국교회 전체를 품고 민족복음화와운동의 선구자로. 한국교회부흥의 견인차로. 한국교회연합운동의 기수로서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교회를 빛낸 불세출의 지도자로서 불후의 족적을 남기셨다.
한국교계의 기념비적인 목회자.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 지도자. 한경직 목사님에게는 그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 어울리는 훌륭한 성품과 인격과 행실의 소유자였다.(기념 강연집. 논문. 발표문 참고)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으신 분. 성령에 사로잡혀 사신 뜨거운 기도의 사람. 경건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주신 분. 철저한 하나님의 청지기로 사신 분. 오직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성도를 위해, 조국을 위해 사신 분. 언행일치. 신행일치. 표리 일치. 복음과 일치하는 성자의 삶을 사신 분. 사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심지어 어린이에게도 존대 말을 쓰셨고 손자 같은 청년들에게도 무릎을 꿇었던 한없이 겸손한 분.
한 세기 가까이 인정이 넘치는 사랑의 실천자로 선함. 인자. 온유. 희생의 섬김과 나눔. 긍휼과 자비의 삶을 예수의 심장으로, 작은 예수로 살아간 목회자. 천사 같은 분.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지도자.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분. 자신을 들어내지 않는 분. 언제나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분신으로 사신 분. 자신은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다 나누어주고 가신 분, 진정한 위로자. 화평케 하는 지도자. 어떤 상황에서도 대적이나 경쟁구도에 끼지 않고 적이 없는 목회자. 비판하지 아니하고 이해해 주는 분. 배척, 외면하는 자 없이 모든 사람들이 반기시는 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분.
신학적으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성경적 입장에서 중용을 유지하신 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셨지만 리더가 되려고 하싱 일이 없고 어떤 직책을 맡던지 최선을 다하고 순서가 있든 없든 시간 안에 참석하셔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성실성과 모범을 보이신 분이셨다.
한경직 목사님은 최고의 학문과 능력과 자질을 다 갖추셨고 국내 최대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면서 그렇게 많은 불후의 공적을 이루어 놓으셨기에 얼마든지 부귀와 영광과 화려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으며,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사시고 성자처럼 거룩한 삶으로 아름다운 최후를 마치셨기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물론 타 종교인들과 불신자들에게도 칭송을 받으시는 분이어서 아직도 한국교회에 한경직 목사님을 대신할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한없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어른의 위대한 신앙유산을 되새길수록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솟아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은 나 혼자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위대한 삶을 사신 한경직 목사님을 감히 닮고 싶다는 욕심은 사도바울이 되겠다고 덤비는 무모함이 아닐 수 없겠지만 그토록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을 만분의 일이라도 닮아가면서 나의 남은생애를 잘 매듭 짖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