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과 긍휼의 섬기는 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예수
1) 사랑과 긍휼의 사역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역사적 예수는 성령의 권능으로 많은 이적과 기사(奇事)를 행하셨으나 그는 능력이 제일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의 청빈과 온유와 긍휼과 화평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8가지 복을 산상설교(die Bergpredigt)에서 선포하시는 사랑과 긍휼로 가득찬 사역자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예수는 이렇게 설교하신 그분 자신이 사랑하시고 인자와 긍휼하신 자로서 삶과 신앙의 궁색함 가운데 사는 유대인들 가운데 화평을 심어신 자이다.
예수는 한 나병 환자를 고치실 때에도 그를 불쌍히 여기서 고쳐주셨다. 마가는 다음같이 증언한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 1:41-42). 예수의 치유사역에는 병든 자에 대한 긍휼이 동반되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스스로 기적 치유자라는 우월감에 사로 잡히신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긍휼의 사역자셨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예수는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의 글(사 42:7; 사 58:6)을 펴시고 읽으시며 이 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눅 4:20-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는 단지 초자연적 능력의 과시자(誇示者)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들을 보게하시고, 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그의 성령 사역은 이처럼 그 속에 솟아 넘치는 사랑과 긍휼에서 나오는 권능의 사역이었다.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는 원수 사랑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3-45). 예수는 자신이 가르치신대로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3-34). 예수는 자신이 가르치신대로 죄인인 우리의 대속을 위하여 속죄물이 되신 사랑의 사역자요 구세주가 되셨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증거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2) 섬기는 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께서 권능적 사역을 하신 것은 섬김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섬기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성령의 권능 사역의 본질은 자기 능력의 과시 행위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섬김이다. 예수는 소외되고 병든 약자들을 위해 오셨고 일하셨다. 섬김이 곧 디아코니아(diakonia)이다. 예수는 원형적 디아콘(Diakon)이다. 예수는 성자였으나 인간의 고통과 죄 속의 비참의 상태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의 영광의 본체를 내려 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들어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미 출애굽기에 드러나는 쉐히나(Schechina)의 하나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a). 쉐히나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상태에 있는 그의 백성의 고난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이시고 그 근심을 아시고 받고 있는 그의 백성에게 내려오셔서 이들을 이집트인들에게서 건져내시고 이들을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쉐히나는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그의 창조물 가운데 거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스런 현실에 공명하셔서 그 현실에 직접 참여하고 자신을 그 고통 아래 놓는다.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니신 능력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그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셔서 그 마음이 애끓은 공명을 일으켜 스스로 그들에게 내려가셔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고난, 이것이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방식이며 공명이 낳은 행동양식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여기서 그 힘을 얻는다. 하나님이 가지시는 그의 백성들과의 연대는 단지 심리적 연대에 그치지 않는다. 간접적 지원에 머물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디아코니아는 그 행동의 방향과 정당성을 얻는다." (김상기, "디아코니아는 예수 활동의 본질이며 사랑·정의의 완성" [기독일보] 이동윤 기자 dylee@cdaily.co.kr 입력 2015.01.30 08:04 | 수정 2015.01.30. 08:50, '디아코니아 아카데미 2기')
고통당하는 자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과 예수의 공통점이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대국 니느웨 성을 향한 심판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다음같이 항변한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b). 요나의 항변에 대하여 다음 같이 다정하게 대답히시는 그 분의 말씀에서 이방 민족이라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0-11). 누구에게나 있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그가 하나님 형상의 잔재(殘滓)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불신자들까지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공명하고 그의 이웃이 되고 그를 위해 행동할 수 있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의 실천적 표현"이다. 지배자들이 약자를 억압함으로써 부를 증식하는 불평등을 확대해가는 것에 대해, 예언자들은 지배자들에게 삶의 길을 바꾸라고 경고한다. 예언자들은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는 일”이요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듣는 일“이다. 법을 매개로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과 만난다. 디아코니아는 “사랑과 정의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아코니아는 예수 활동의 본질이다. 예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가는 그의 길 가운데 쉼이 있다.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쉼은 그의 멍에를 메고 배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디아코니아의 길에 있다. 사랑으로 일하는 섬김은 성령의 능력이며, 가장 크고 좋은 은사로서,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고 사막에 꽃이 피는 그 길은 성령의 능력, 디아코니아에서 시작된다. 그 변화를 위해 예수는 성령을 약속하셨고, 우리도 성령이 부르는 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위해 오신 예수를 쫓고 그의 실천과 계획을 오늘의 우리 삶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동일시되거나 비교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람들에 대해 약자를 조롱하거나 학대하는 자는 곧 자기를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다(잠 14:31:잠 17:5). 그와 같은 하나님과 예수의 약자 이해 때문에 “약자는 더 이상 자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교회는 그들을 통해 그들과 동일시 되려고 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디아코니아의 성경적 근거는 나사렛 예수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공명과 연대 및 고난'에서 찾을 수 있다.
IV. 성령능력의 통로 예수
인간 예수는 성령능력의 통로가 되셨다. 그는 성령으로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셨고, 대속제물이 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1.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한 순종하신 예수
예수께서 공생애에서 하시는 모든 권능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죄성으로 인해 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7-8). 사도 바울은 죄인들이 언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것을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예수께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인한 성결의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에 그의 인성은 온전한 성결을 이룰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b)라고 증언한다.
2. 오늘날 성령 사역자의 모델 되시는 예수
예수는 제자들에게 치유사역을 가르치고 훈련하셨다. 그의 성령 사역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않고 교회시대에서도 지속될 것을 가르치셨다.
1) 성령의 권능으로 70인을 내 보시어 전도 사역, 마귀 제압
예수께서 70인 2인조 전도대를 보낸 것은 오늘날 전도대의 영적 능력을 예시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의 이름에 귀신들은 전적으로 항복하였다(눅 10:17). 사막의 영성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가운데 어느 날 밤 야수와 파충류의 모습을 한 마귀떼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성령의 빛이 그에게 내려 옴으로써 “갑자기 마귀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의 몸의 고통은 즉시 멈추었고, 무덤은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김영한, 『안토니우스에서 베네딕트까지』, 정통기독교영성가 제 1권, (서울: 기독교학술원, 2011), 82.)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영적 체험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과 전도자들은 예수로부터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눅 10:19a)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귀신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b). 오늘날 신자들이나 전도자들은 이러한 영적 권세 받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우리 이름이 하늘에 녹명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2)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에 복음전파, 가르침, 치유 및 양육 사역 위임, 권능 부여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병과 귀신을 제어하고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눅 9:1).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라고 명령하시어 파송하셨다(눅 9:2). 특히 선교의 지상명령에서 예수는 성령 사역자의 원형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 명령을 내리신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예수는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축사, 새 방언, 독에 해 받지 아니함, 병든 자 치유를 말씀하신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세계 선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가 동반하는 능력으로 전파디고 있다.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에는 항상 귀신이 추방되고, 병든 자들의 치유가 일어나고 각종 초자연적 표적이 일어난다.
3) 권능의 현재화
목회나 선교현장에서 축사나 질병을 치유할 때 성령 사역자들은 치유의 위임자인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떠나가라.”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간구하거나 명령하면 그대로 직접 시행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오늘날 역사적 예수는 2천년 전(前)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박물관에 계신 것이 아니다. 그는 살아계시는 인격으로 오늘도 그를 믿고 신뢰하는 자의 중보자가 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역사적 예수의 현재성을 다음같이 증언한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4-25)
오늘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이 부재하여 하나의 종교적 인본적 집단으로 변모된 교회는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매우 인간적으로 볼 때 인도주의적 신사도(紳士道)의 종교라고 평가받지만, 예수의 복음과 능력이 부재한 인본주의적 종교로 변모되고 있다.
저자는 글을 쓸 때 기독교방송(CBS)과 극동방송(FEBC)을 즐겨 청취하곤 한다.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 오전 11시 05-50분에 방송되는 극동방송의 「소망의 기도」는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고 중보기도의 능력의 시간”으로 병든 자들과 어려운 삶의 문제에 대한 기도치유의 시간이다. 이 치유 기도 프로그램이 일회적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 지속되는 것을 보면 기도에 참여하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치유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현장화되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에 참여하는 지역 목회자들은 모두 성경 그대로 믿고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바 성령의 현재하는 능력을 그대로 믿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오늘날 예장 통합측 온누리교회 장로로서 치유사역을 하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 손기철의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Heavenly Touch Ministry)와 개인적 간증 전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달하는 평신도 전도자 김하중의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 of God) 사역도 오늘날 주목되는 성령 은사 사역이다. 이들은 교리나 이론이 아닌 병든 자들에게 일어나는 치유(손기철의 사역)와 삶과 신앙의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를 알려줌(김하중의 사역)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려주고 있다. 그 외 저자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한국교회 안팍에서 일하는 헤아릴 수 없는 목회자들, 선교사들과 평신도 사역자들의 사역과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신체와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새로운 소망과 삶의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을 헤아릴 수 없다.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와 정통주의자로 자칭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이러한 성령 능력의 현재화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며 이러한 능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이단적 내지 신비주의적, 불건전한 신앙“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교리 안에 맞추어진 신학적 지식과 교리적 설교를 통하여 살아계신 성경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교리가 만든 하나님 상에 갇혀놓았다. 이를 저자는 “성경 이신론”(bible deism)이라고 명하고자 한다.
오늘날 일부 정통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해석한 교리적인 성경 안에만 가두어 놓은 성경 이신론자들에 반하여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인 찰스 그래프트(Charles H. Kraft)가 그의 『능력 그리스도교』(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능력 복음전도(power evangelism)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하나의 종교적 관습이나 윤리로 변질한 자유주의 기독교나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와 전통적 교리를 단지 추상적으로만 인정하고 삶 속에서 부인하고 있는 실천적 이신론 기독교 신자들에 대하여 기독교 복음이 상실하고 있는 사도적 기독교를 복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공헌하고 있다고 본다. 그가 가진 균형잡힌 의도는 다음 문장에서 보여진다. “나는 오랫동안 그 ‘모든 것’의 일부 – 사랑, 용서, 회개, 복음전도 등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헌신하고 있다고 여기는 일들 –에만 힘을 쏟아 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모든 일’의 다른 측면 – 영적 능력의 차원 - 을 체험하도록 권고하고 계신다. 나는 우리 모두가 사랑에 가득찬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능력에 가득찬 그리스도교를 체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Charles H. Kraft, Christianity with Power, 『능력 그리스도교』, 31.)
단지 저자가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능력 기독교 주장자들이 죄의 회개, 사랑과 용서라는 전통적 복음주의 가치를 소홀히 다루고 오로지 축사, 치유, 황홀경, 쓰러짐, 방언 체험, 음성 듣기 등에 치중한다면 복음이 지니는 영혼구원(칭의)과 성화(성결)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찰스 그래프가 여태까지의 사랑, 용서, 회개, 복음전도의 전통적 복음주의의 입장으로부터 영적 능력의 차원을 체험하는 일에 지나치게 기울어짐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균형성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너무 초자연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4) 성령의 권능을 사랑의 열매로 보여주신 나사렛 예수
역사적 예수는 성령의 권능을 사랑의 열매로 보여주셨다. 그는 초자연적 사역자였으나 그의 모든 능력 사역은 그의 본성인 사랑에 의하여 동기화되고 사랑으로 행해지고 그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이들의 치유자가 되셨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병든자들과 소외자들을 보시고 연민과 공감을 가지시고 이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치유사역을 드러내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는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누가 고쳐주었다고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그의 오병이어 기적으로 인하여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자 피신하여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기영합자(populist)가 되지 아니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숭고하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속죄 제물이 되셨다. 예수는 그가 가르치신 위대한 사랑의 계명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신앙의 본질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을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받는 것(칭의)이나 기독교 신앙의 결실은 주는 것(성화)이다.
성령 사역(능력 치유와 귀신추방)은 칭의와 성화의 교리와 균형있게 행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 은사를 가장 많이 받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이 모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은사 가운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이 없는 능력 사역, 사랑이 없는 방언이나 예언, 사랑이 없는 산 같은 믿음, 사랑이 벗는 구제나 헌신과 희생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사랑 없는 모든 영적 지식이란 공허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깊이 통찰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