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지의 자유인가? 의지의 속박인가?
[기독일보=칼럼] 지금까지 살펴본 논제 1~12에서는 인간의 객관적 행위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중세 스콜라 신학(소위 영광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선한 행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영광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루터는 논제 1~12에서 인간의 행위는 – 비록 선한 행위라 하더라도 – 결코 인간을 의의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이제 논제 13~18은 또 다른 문제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논제 1~12가 인간의 객관적 행위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면, 논제 13~18에서 루터는 인간의 주관적 측면, 곧 의지의 문제들에 대해 논한다. 곧 인간의 의지는 의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주제는 인간 구원의 문제와 연관하여 언제나 어려운 신앙의 주제 중 하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언제나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원죄나 인간의 타락도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일어난다면, 인간이 어떻게 책임성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가 큰 신학적 논쟁으로 대두된 것은 펠라기우스(Pelagius)와 어거스틴(Augustine)으로부터 기인한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 안에 자유의지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의지와 함께 구원에 있어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노력함으로써 선과 구원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어거스틴은 타락 이후 인간에게 남겨진 자유의지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만 남아있기 때문에 늘 악의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회복시킬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의 의지는 구원을 얻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신앙의 교리를 발전시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할 때, 적어도 인간이 그 구원을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제기되어 왔다.
이후 이 문제는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와 루터에 의해 다시 한 번 큰 신학적 논쟁으로 대두된다. 에라스무스는 1524년 9월 1일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On the Freedom of the Will)라는 저서를 출간한다. 여기서 그는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서로 협력하여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자유의지는 자유로운 선택 혹은 능력이란 의미로, 인간이 자신을 영생에로 인도하는 구원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이것을 배격하는 능력이다”(Gordon Rupp, P. Watson, Luther And Erasmus: Free Will And Salvation, p. 47).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인가? 아니면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의 사역인가? 에라스무스는 이에 대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 중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라고 대답한다. 에라스무스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의지는 전적으로 소멸되지 않고 단지 제한적일 뿐이라고 본다. 타락 때문에 의지는 악에 ‘기울’었지만, 여전히 선을 행할 수 있다. 제한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을 얻기 위한 선을 행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완전한 구원을 달성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은혜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서로 협력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에 반대하여 루터는 1525년 12월 출간된 “의지의 노예”(The Bondage of the Will)로 응답한다. 루터는 제한된 자유의지를 말하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을 “반펠라기우스(Semi-Pelagianism)”적 견해라고 비판한다. 이는 타락 이후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보았다.
루터는 자유의지가 구원에 있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자유로운 선택의 힘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De Servo Arbitrio in LW, vol. 33, 68)
루터는 인간의 의지가 타락 이후 그 자유성을 잃어버리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행하도록 되어 있다. 타락 이후 자유의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명목상으로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에 있어 협력하는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인간이 제어 할 수 있는 분으로 남게 되고, 그러한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다. 루터는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역인가?’에 대하여 단호하게 ‘아니오’ 라고 대답한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란 과연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 루터는 만일 우리가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구원, 축복과 저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래 있는’ 일상의 삶의 문제로 제한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입을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크게 간섭하시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 ‘아래 있는’ 것들로 자유의지는 여기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LW 33,70)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를 논함에 있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성의 문제는 언제나 교회가 타락하고,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비난 받을 때마다 등장했다는 점이다.
펠라기우스가 활동했던 400년경 당시 로마 교회는 도덕적으로 대단히 부패한 상태였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 능력이나 지혜가 부족하였다. 부자들은 폭식, 폭음, 간음, 마술 등에 빠졌고, 일반인들의 성적 부패도 심각한 상태였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했어야 마땅할 텐데 로마 교회의 부패는 세속의 부패에 못지 않았다.
에라스무스 역시 중세 교회의 타락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세속적인 부를 추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성직의 자리는 매관매직 되었고, 교회는 구원을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돈으로 사고파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타락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도덕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과 루터의 대답은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의 교회 개혁의지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개혁의 바탕이 되는 신학기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와 루터도 마찬가지이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에 대한 참된 지식이나 교리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 개혁을 주장하는 르네상스적 합리주의자였다. 반면에 루터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루터는 단지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이고 윤리적 차원의 개혁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에 기초하여 기독교인들이 참된 영성을 회복하고, 오직 믿음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원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많은 이들이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말한다. 사회적인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된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하나로 한편에서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 ‘기독교인의 책임성’ 등을 강조한다.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과 선한 행위의 측면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강조가 다시금 ‘하나님의 구원하는 전적인 은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신학은 기독교인의 책임성과 윤리를 강조하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단지 또 다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 만큼 교회 개혁과 기독교인들의 삶의 변화를 바라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은 단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영적이고 신앙적인 개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단지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문제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금까지 서술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이러한 서론적 이해와 함께, 논제 13~18에서 루터가 인간의 의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