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우리가 보통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미래의 실험 영역으로서의 역사를 말하는데 경험에 의하면 우리들의 뜻을 실현 시켜주는 역사가 있는가 하면 또한 편에는 우리의 미래를 방해하는 역사도 있다.
따라서 우리의 희망도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이 있다. 적극적인 희망이란 부정적인 것과의 고뇌의 투쟁을 통해서만 살아남고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또 한 번의 이러한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기점에 와있다. 그것은 4월 13일 총선이다.
우리의 미래는 희망과 기대만이 아니고 고뇌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미래이다.
월터 라우센부쉬가 말한 대로 ‘세상을 악하다고만 말하지 말고’ 우리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가 좀 어렵더라도 신앙인답게 용기 있는 확신을 가지고 새 역사를 창조 한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선거에 임할 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당 보다는 인물로 선택해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는 분명한 철학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공자’는 정치의 원리를 간단히 요약하여 바로 정(政)을 바로(政)이라고 했다. 정치는 옳은 일을 하되 바른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말이다.
물론 바르게 하면 정치 생명은 길 것이다. 그러나 악한 세상이니 만치 늘 정적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에 권력은 잡아도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세가 있으나 저희 에게는 위로가 없도다. 라고 했다(전4:1절). 이러고 보 니 권력을 가졌다고 뽑낼 것도 없고 권력이 없다고 탄식 할 것도 없다. 권세가 있다고 행복 한 것도 아니며 없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을 가진 자를 뽑히기를 소 원해본다.
둘째,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는 선한 목표를 위해서는 위험을 무릎 쓰고 고난을 감행할 만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온통 자기 영달이나 자기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는 많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신한 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다.
지도자는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 가장 불신을 받는 사람이 정치인 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보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인 줄 알면서도 정견을 토해내는 감언이설은 유권자를 속이기에 앞서 이 자신을 속이는 비열한 행위이다.
또한 지도자는 희생과 봉사를 생활화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서 베푸는 선심이나 얼굴 알리기로서는 참다운 지도자의 자질을 인정받을 수 없다. 평소에 자기를 희생하여 지역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인물지도자이다.
종의 자리에서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섬기는 자세로 일생을 사셨고 자기 목숨까지 만인의 대속 물로 주셨던 예수님은 희생과 봉사의 모범이시다.
마태복음 20:20-28절에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않게 하 여 주소서”라고 요구해 왔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누구든지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되고 섬김을 받고자 하면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입으로는 국가 민족의 장래를 위한다지만 벼슬자리에 않기만 하면 제 권위, 제 위신, 제자리 에 손실과 상처만 안 입겠다고 갖은 수단을 부리는 아니꼬운 인사들에 겐 결코 권세를 맡겨 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덕성은 핵심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깨끗한 정치 풍토가 조성되고 지도층의 도덕성이 회복 되어야 한다. 바른 지도자 선택을 하는 길만이 미래를 열어가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과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명실상부한 선진 조국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