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고난 주일을 보내고 부활절과 함께 4월에 접어들면 산에는 온통 봄꽃들이 만발 한다.
이때쯤이면 생활에 찌든 마음을 헤치고 아름답고 순결한 감정을 회복 시켜준다. 세상이 좋아 보인다. 겨울을 보내고 기다림 중에 활짝 피어나는 꽃들로 세상이 환해진 느낌이다.
찬 기운이 완연히 자취를 감추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동면한 풀잎들이 대지를 꿔 뚫고 솟아 나오면서 그 생명력을 과시하는 계절이다.
죽은 것 같으나 살았다는 함성이 들려지는 계절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야외로 봄나들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당연히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그의 부활을 생각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무죄한 신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사와 감 격을 가져오게 한다.
죽은 듯 조용하던 대지에 새싹이 티어 오는 것은 죽음 뒤에 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 하 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 없는 부활이나 영광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이나 유혹에 빠질 때가 많다.
이 말은 곧 뛰지 않은 경주자가 일등을 기대하는 망상과 다를 바 없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 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한 결 같이 부활 사건을 전해 주고 있다. ‘빈 무덤 설화’, ‘엠마오 길의 예수 이야기’,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등이 모두 예수 부활을 전 해주는 예수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보다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이야기들을 집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왜 고난을 받고 부활 하셨는가? 분명히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보활 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과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서 그 핵심적인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활 하신 주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 20)고 명령하였다.
예수가 우리에게 명한 것이 무엇인가?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예수의 어떤 삶과 사상을 기념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게 하려고 부활 하셨다. 예수의 부활 신앙도 없이 부활 주 일 공동 예배의 주도권 싸움이나 하고 교회를 사유물과 같이 생각하고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는 이름으로 온갖 불의를 행하는 종교 주의자들은 부활 신앙은 없고 권위주의 자들을 위해서 부활 하신 것이 아니라 병들고 억압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다.
4월이 되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꽃 피우기 위하여 죽음을 사수하였던 젊은 이들의 희 생을 기억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국가만을 위해서 일어섰던 그 마음 우리도 지니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도 한다.
과연 오늘 우리 사회나 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에의 참여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나치게 쉽게 예수를 따르려 하고 너무 쉽게 애국의 대열에 서려고 하는 것 같다.
쉽게만 살려고 하고 쉽게만 성취 하려고 하는 이런 삶은 생의 기만이다. 이런 태도는 절대자를 향한 사기를 치려는 불손한 행동임을 이제 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봄과 함께 맞은 부활 신앙임을 명심하자.
4월은 축복의 길이 환히 트여 있는 달이다.
그러나 문제 는 이 길을 가는 자들이 적다는 것이다. 아마 이 길이 좁고 어려워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길만이 참 길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제 의연히 돌아서서 이 봄의 훈풍을 맞으며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로 열심히 걸어 가 야 한다. 역시 인간사 최고의 대박과 인생 역전의 드라마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우리 주 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일과 그 부활의 증인으로 우리 주님 앞에 당당히 서는 일이 아닐까 봄의 의미를 새겨 보게 된다.
아! 부활을 알리는 봄의 기운이 싹터 온다.
축복의 길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