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들은 인권운동으로 포장된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알아야
신학대 내의 동성애 운동 확산은 교수들의 책임이고, 한국교회의 위기차원으로 봐야
작년 6월 26일(현지시간) 미국연방대법원의 5:4 판결로 동성 간 결혼이 합법화 되면서 다음날 서울광장에서 벌어진 제16회 퀴어 축제는 절정에 달했다. 미국을 비롯한 10개국의 외국대사들의 지지 격려로 동성애자들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작년 8월, 동성결혼 합법화 주도자인 긴즈버그 미 연방 대법관 방한, 지난 11일의 미 오바마의 최초의 성소수자 인권 특별대사인 랜디 베리 특사 방한은 인권외교를 빙자한 노골적인 동성애 확산 선동이었다. 유엔과 국가인권위원회가 동성애 확산에 앞장서면서 지금 한국엔 동성애 쓰나미가 밀어닥치고 있다. 벌써부터 퀴어 측은 오는 6월 축제 기획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작년 12월 31일 교단으로서는 드물게,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장정을 개정하여 ‘동성 결혼과 동성애 찬성 및 동조 행위’를 할 경우, ‘정직’ ‘면직’ 또는 ‘출교’에까지 처할 수 있는 조항을 넣었다. 동성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감리교 교단이 시대적 상황에서 교단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 내린 의연한 결단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소수자를 차별하기 위해 무기를 꺼내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독버섯처럼 번지는 동성애 문화 확산에서 교단과 교회 구성원에 대한 보호와 한계를 그으려는 고육책으로 본다.
이에 맞서 지난 18일 감리교 본부 앞에서는 <성소수자 탄압 장정을 반대하는 감리교 신학생 및 전도사 모임> 이라는 30여 명의 참석자들이 가면을 쓰고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제목은 ⌜감리교 성소수자 차별 입법 및 서명운동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날 참가자들의 기도와 감독회장에게 드리는 편지, 그리고 성명서를 살펴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는 예수님이 차별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라도 품에 안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면서,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예수님이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시고, 차별 없이 대한 것은 맞는 일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를 품에 안으시고 지지해주는 모습은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더구나 목사 후보생이라면 뻔히 아는 사실이다. 만약 동성애자가 소외된 자 가운데 소중한 존재였다면,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만나는 모습을 보여 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주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에 보면, “너는 여자와 동침함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위기18장22절) 또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위기20장13절)라고 되어 있다. 구약에 정통하신 예수님께서 이를 모르실 리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감리교 교단에서, 동성애 조항이 들어 있는 국가인권위법 제2조 3항의 문구를 삭제하자는 서명운동을 한 것을 가지고, ‘성적 지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취업을 하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거나, 교육시설을 이용할 때, 차별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서명운동에 대한 무지이고, 지나친 억측이다.
기독교에서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무엇보다 국가 기관이 동성애를 조장하고 보호하려는 법제에 대하여 삭제를 요구하는 것과, 동성애자들을 종교에서 탄압하자고 하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이를 침소봉대하여, 마치 기독교가 동성애자를 탄압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의 왜곡된 인권전략에 속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소수자가 우리의 강도 만난 이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성소수자’라는 정확한 개념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성소수자’는 다양하다. 동성애자를 포함한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소아성애자, 시체성애자, 동물성애자, 사물(기계)성애자, 새디즘, 마조히즘, 무성애자 등 다양하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강도 만난 이웃인가?
또 이들은 헌법에 보장된 사생활 침해(제17조), 표현의 자유(제21조, 제22조)에 대한 침해로 보고 있다. 물론 성적인 문제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서울광장에서 축제를 열며, 자기들의 성애를 사회에 교육 하고 확산시키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사적인 생활을 사회적 문제로 비화시킨 것이다. 공공의질서와 국가안위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제약되는 것은 건전한 국가공동체를 위해서 불가피 한 것이다.
특히 동성애 문제는 우리 사회 기존의 건강한 가정제도, 혼인제도,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 문제, 출산 문제, 질병의 문제, 복지 문제 등 다양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사생활과 표현의 자유로만 보기에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남성 동성애자들에 의한, 에이즈의 확산은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에이즈 환자의 치료 및 요양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전액 부담).
또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성소수자에게 죄를 묻는 교만을 거부한다” 고 한다. 이는 그들에게 죄를 묻자는 것이 아니라, ‘죄가 됨’을 알려 주어서, 그 길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주고, 바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지 정죄가 아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엄히 명하셨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성애자들의 궁극적 목표는 이를 토대로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 것이다. 만약 이런 법이 만들어지면, 양심적이고, 선량한 의식을 가진 수많은 국민들이 ‘역차별’을 받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목사들의 설교와 성도들의 전도가 법의 타격을 입을 것이다. 현재 동성애를 기반으로 ‘차별금지법’을 만든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반 대학도 아닌 일부 신학대들에서도 동성애 동아리와 동성애를 옹호하는 움직임이 나타나, 미래 교회 지도자들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본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흔히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권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그 문제의 심각성과 그로 인한 개인의 행복과 ‘참 인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동성애 운동자들은 교묘하게 ‘인권보호운동’ 이라는 탈을 쓰고 사람들을 홀린다. 동성애가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인권 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은폐한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기자협회가 맺은 인권보도지침이 그것이다.
사실 프랑스 대혁명이나 영국의 윌버포스, 미국의 링컨 대통령, 마틴 루터 킹의 ‘인권 운동’은 정말 짐승처럼 고통 받는 흑인 노예들의 인권을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자는 바른 인권 운동들이었다. 그런데 현대의 동성애 운동은 그런 좋은 인권운동의 포장 속에, 여러 가지 정치/사상/철학/심리학/사회학의 정체를 숨기고, 젊은이들과 순진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이를 환호하게 된다.
동성애자들을 포함한 ‘성소수자’들은 성경에서 도와주도록 권면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공익을 지키는, 깨어 있는 역군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도성을 지키는 거룩한 전사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부 교단의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동성애를, 굴절된 인권 차원에서 지지하고 옹호하기 보다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또한 잘못된 판단으로 그 물결 속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는 사역은 혐오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다. 오히려 탈 동성애 운동에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