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관계는 어느 때보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이지만 반도의 끝자락 남녘에는 벌써 봄이 왔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파와 폭설로 하늘길까지 막혔던 제주도에 어느새 바람에 넘실대는 유채꽃이 광치기 해변 들판을 샛노랑으로 물들이고, 청보리밭에도 초록의 향연이 드넓게 펼쳐졌다는 소식입니다.
윤동주 서거 71주기가 되는 지난 17일, 흑백의 영상이 그의 시와 꼭 닮은 영화 <동주>를 보고 왔습니다. <동주>는 확실히 <잔상>이 남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순간부터 뭔가를 새로이 곱씹어 보게 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화려한 색을 입히지 않아도 새벽녘 어슴푸레한 여명이나 먼지 하나하나의 움직임까지도 다 잡아내는 디테일이 컬러 영상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영화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배경 삼아 <동주>와 <몽규>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담담히 바라봅니다. 감독은 모든 장면을 마치 연극무대처럼 단출하게 구성하고 극히 절제된 대사와 감정 표현으로 끝까지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진중한 태도를 견지합니다. 흑백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음과 그 어떤 영화보다도 수려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은 감독의 힘을 뺀 연출력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의 호연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강하늘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감으로 배우 강하늘을 넘어 완벽하게 시인 윤동주로 분합니다.
<동주>는 어둠의 시대 수치심, 열등감과 함께 꿈을 가득 품고 살았던 두 청춘 동주와 몽규의 민낯을 통해 이 시대 모든 <청춘>들까지 뼈저리게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흑백사진 속 시인의 모습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는 감독의 당초 의도대로 <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정갈한 결벽을 추구했던 시인의 모습을 썩 훌륭하게 담아냈습니다. 산문을 더 좋아했던 몽규는 시를 좋아하던 동주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인물로 개인의 이상보다는 민족의 독립을 더 바랍니다. 반면 동주는 시인이 되는 게 중요했습니다. 몽규처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시집>을 내고자 하는 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몽규 또한 그런 동주의 꿈을 지켜주고 싶어 합니다.
지난해 영화 <사도>로 시대를 관통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을 이야기했던 이준익 감독이 이번에는 다시 <동주>로 어느 시대나 공감할 수 있는 <청춘의 아픔>을 담아냈습니다. 극중의 동주와 몽규는 오늘을 사는 청춘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매사에 역동적이고 주체적인 몽규와는 달리 동주는 늘 망설임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순간들을 그때그때 시에 담아두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 고백이자 참회록이었습니다.
감독은 영화 중간 중간 삽입된 여러 편의 시 내레이션을 통해 동주와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정서와 고민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강하늘의 담백한 목소리로 한 편 한 편 들려주는 동주의 시들은 그 어떤 열띤 대사나 극적인 연출보다 더 우리들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여진>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때 읊었던 <별 헤는 밤>은 두 사람 사이의 풋풋한 감성을 느끼게 했고,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후 읊은 <참회록>의 구절에서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던 청년 동주의 고뇌와 비애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점점 피폐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읊은 <서시>는 색채로 꾸미지 않고 신파로 울리지 않아도 이 영화가 충분히 격조가 있음을 보여주기에 족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 <동주>를 보고 와서 다시 한 번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들춰봤습니다. <동주>와 <몽규>를 생각하며 <자화상>도 읽어 봤습니다.
윤동주 시인, 이제 더는 부끄러워 마시길...당신의 그 짧은 생애는 충분히 힘들었고 너무도 값졌고 아름다웠나니...
/노나라의 별이 보내는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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