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干證)"이라는 단어는 '사건을 목도한 증인의 진술'을 의미하는 법률 용어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법정에 목격자로 선 증인은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오직 목격된 자만을 부각시킨다. 목격된 자의 생김새와 목소리, 걸음걸이 등이 목격자가 해야할 간증의 요소이다. 목격자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법정에 증인으로 선 목격자가 자신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증인석을 떠난다면 그는 증언에 실패한 목격자일 것이다.
기독교는 간증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목도한 자들이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의미하기 위하여 채용했다. 그래서 참된 간증은 간증한 사람이 부각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목도한 예수님만이 부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닌 간증자를 부각시키는 진술은 실패한 간증이다.
오늘 날 이루어지고 있는 간증을 살펴보면 본연의 목적과 정 반대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증을 위하여 교회의 증인석에 선 사람들이 '목격된 예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 분을 '목격한 나'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축복의 예수님'이 아니라 '축복받은 나'가 간증된다. '신유의 예수님'이 아니라 '신유받은 나'가 간증된다. 그리고 '축귀의 예수님'이 아니라 '축귀받은 나'가 간증된다. 간증자들은 '목격한 나'를 간증의 주제(主題)로 삼기 위하여 '목격된 예수님'을 각주(脚註)처리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슬픈 일이 일어났다. 간증을 들은 사람들의 뇌리에 예수님은 남지않고 간증한 사람이 남게 된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간증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사도 바울이다. 내가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의 간증 속에는 바울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충만했다. 그래서 그의 간증을 통하여 내 귀에 예수님이 들렸고, 내 눈에 예수님이 보였으며, 내 피부에 예수님이 느껴졌다. 우리가 신약 성경의 1/3을 쓴 사도 바울에 대해 지극히도 제한적으로 아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는 간증의 주제(主題)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기위해 자신을 각주(脚註)처리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얼만큼 축복하셨는지에 대해서 거의 함구한다. 그대신 그가 만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세하게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의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바울이 아닌 예수님을 듣게된다.
나는 죽고 예수님만 드러나는 간증...이런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21 세기에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