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요즘같이 통신이 발달한 때에 편지를 받아 본적은 드물 것이다. 편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편지가 고대하던 사람으로 부터 온 것이라면 기쁨은 그 배가 되리라고 본다.
이제 기다리던 편지를 받은 어느 한 남자의 이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현대의 보편화된 어느 주말 부부의 이야기이다. 남편은 지방에서 근무하고 부인은 세 아이와 함께 서울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부인은 가족들의 근황을 적은편지 한통을 남편에게 썼다. 그리고 그것을 세 아이 중 한 아이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우체통에 넣었다.
비에 젖고 겉봉투의 글씨가 빗물 때문에 버려지고 흐려졌겠지. 그 와중에 편지를 수거하던 우편배달부는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내 정리 하다가 그만 땅에 떨어뜨리고 만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젖은 땅에 덜어진 편지를 길 가던 그 행인이 무심코 밟아 버린다.
그 편지가 남편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 상태가 어떠했을까?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구겨지고 모서리는 너널 너덜해지고 비에 젖어 번진 그 한 가운데에 찍힌 발자국하며... 한 마디로 편지의 기능은 사라 졌으리라 상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내의 필적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는 것이다.
<고후3:1-3>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아마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구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악행과 문제점들에 대해 심하게 책망을 하게 된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 실망스런 일들이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머리를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운 실정이다.
어제 전철을 타고 가는 중 신천지에서 나오는 간행물을 배포하는데 이미 알려진 대형교회 사 건들로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목회자의 칼부림’ 목사 아버지의 딸 시신 유기 사건 등 참으로 한국 교회는 더 이상 기대 하기조차 어려운 듯 느껴지는 내용들이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의 초창기는 어떠했는가? 이 당시 교회는 비탄(悲嘆)과 암영(暗影)이 깃들인 구한말 사회 속에서 교회로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행하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샤마니즘과 불교와 유교로 굳어 질 대로 굳어진 묵은 땅을 기경하기 위하여 교육과, 언론, 병원과, 사회사업을 펼치었고 그 정지되어가는 심령 밭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 해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성서를 번역하고 신학교를 세우고 사경회를 개최하여 평신도의 역할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 다. 교회는 사회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 열렬히 민중을 교화 계몽하고 때로는 강연회 토론회를 비롯하여 한글 강습회 연극 회 문예 활동. 등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 자세를 보여 주었다. (정하은 ‘한국 근대화와 윤리적 결단’ 42페이지)
성서 속에 나타난 위대한 이들은 민족의 범죄와 교회의 세속화를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 하였나?
느헤미아를 통해 지혜를 배우게 된다. 포로의 생활 중에 자기 조국 예루살렘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고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자기 민족의 죄를 회개했다.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 하나이다. 이제 주의 종이 이스라엘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범죄 함을 자복 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들어 주의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예수님의 말씀이 실행되는 곳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결함을 지닌 교회까지도 ‘기쁨과 영화의 화관 이라고 하였다.
“주여 한국의 교회가 범죄 한 탓이오니 용서하여 주소서 어서 속히 그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다림이 너무 길고 길어 지치고 지쳐 있나이다. 오직 성령님만이 잘못된 길로부터 우리를 구원 하시고 예수님께로 되돌아가게 하실 수 있나이다.”
기도하는 중 주님이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구부러진 곳을 살펴서 곧게 하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