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기독일보=인터뷰] “어느 날 갑자기 깨어보니 성공했더군요” 이런 말은 현실에는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이 성공한 사실을 알 수는 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오랜 기간의 준비와 노력, 좌절과 아픔이 없는 경우가 없다. 이제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작곡가 ‘신혁’이란 이름을 모를 수도 있지만 저스틴 비버나 엑소, 샤이니, 소녀시대를 모르기는 쉽지 않다. 그들의 노래를 만든 그 사람이 바로 줌바스뮤직그룹 신혁 대표다.
버클리음대 4학년이던 2009년, 신혁 대표가 세상에 공개한 첫 번째 곡 <원 레스 론리 걸(One Less Lonely Girl)>은 저스틴 비버의 첫 정규앨범 마이 월드(My World)에 수록되며 단숨에 빌보드차트 1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앨범 자체는 빌보드 1위에 올랐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20대 한국 출신 유학생의 노래가 미국 빌보드를 기습 점령해 버린 사건이다. 이후 케이팝(K-Pop) 시장에서도 신 대표의 이름을 자주 만나게 된다. 엑소(EXO)의 <너의 세상으로>는 중국 음반 차트인 시나에서도 1위를 기록했으며 엑소의 대표곡 <으르렁>은 빌보드 월드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케이팝으로 세계 음악계에 신 대표의 이름을 다시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2011년 그가 세운 줌바스뮤직그룹은 할리우드와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작곡, 음반 프로듀싱, 신인 발굴 등으로 이 업계에서는 '잘 나가는 신생 기업'에 들어간다.
이쯤 되면 신혁 대표에 관해 자세히는 몰라도 '성공한 한인'이란 건 확실하다.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성공으로 시작해 여전히 성공 중인 그의 인생이다. 그러나 그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면 신혁의 표정엔 불편함이 스친다. "아... 예... 감사합니다. 실은 제가 한 일이 아닌데요..." 그에게는 성공이란 단어보다 '예정과 소명'이란 단어가 더 익숙하다. 경험도, 인맥도, 돈도 없었던 신혁을 미국 주류무대에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아주 정말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가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어요."
중학교 2학년 때, 그가 다니던 중학교에 '컴퓨터 음악'이란 학생 클럽이 생겼다. 평소 음악을 좋아했던 신 대표는 주저 없이 이 클럽에 가입했다가 음악의 세계에 눈을 뜬다. 미래에 자신의 노래를 빌보드차트에 올리겠다는 야무진 꿈도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까지 신혁이 작곡한 곡은 무려 50여 개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첫 직업은 가수였다. 잘 생긴 외모에 탄탄한 가창력까지 있었으니 '뭐가 좀 되려나' 싶었지만, 그의 첫 앨범 'Soar'는 썩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19세에 겪은 첫 번째 실패였다.
"그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가수가 제 길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어요. 아마 그때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겠죠."
그러나 실패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음대로 유학을 택했다. 혼자 남겨진 방에는 영어 문제, 고독함, 불확실한 미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음악 좀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버클리에 와 보니 자신은 평균 수준 정도였다.
"힘들었지만 꼭 필요한 시간이었어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어려움을 음악으로 해소해 갔죠. 특히 기도하는 어머니와 가족이 그 시기를 견디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터널은 길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음악을 만들고, 주말에는 뉴욕으로 버스를 타고 올라가 데모 곡들을 여기저기 뿌리며 발품을 팔았다. 찬밥 신세일지라도 돈도 없고 빽도 없으니 별수 없었다. 대학 4년을 마칠 때가 되자 '이제 끝났다. 한국 갈 짐이나 싸자'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신혁 대표가 포기를 선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한 계획을 이뤄가고 계셨다. 신 대표가 '정말 자신 있어'하던 바로 그 곡이 아니라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던 곡이 당시 신인인 저스틴 비버에게 가면서 일약 히트를 친 것이다.
"중학생 때 품었던 막연한 꿈이 한순간에 이뤄진 거예요.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돈도 벌었죠. 그때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정확하게 인도해 주셨단 걸요. 제가 한 일이 아니니 겸손히 감사할 뿐이에요."
가수로서의 시행착오, 4년간의 유학과 무명생활 후 하나님이 주신 성공. 그렇게 승승장구로만 끝나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의 생각은 또 달랐다. 그가 세운 프로덕션 회사가 곡 계약 과정에서 한 업체와 마찰을 빚으면서 유명무실한 상태가 돼 버린 것이다. 그 많던 돈도 야금야금 날아갔다.
또다시 찾아온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케이팝'이란 길을 열어 주셨다. 한국 대중음악계가 신혁 대표에게 러브콜을 먼저 보내왔다. "비가 오면 돌아가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 케이팝으로 방향을 튼 신 대표에게 다시 기회가 생겼다. 오직 미국에만 꽂혀있던 그의 시선이 미국과 한국 시장을 오가며 세계로 넓혀졌다. 할리우드와 서울에 줌바스뮤직그룹을 설립했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 반경을 확장하고 있다.
"아마 계속 잘 됐다면 한 가지 밖에 몰랐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줌바스뮤직그룹은 작곡, 프로듀싱을 비롯해서 신인을 발굴하는 일도 하고 있다. 요즘은 신인 한국 가수들을 미국 무대로 내보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바로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시작된 '음악인 신혁'의 삶은 결국 소명을 향해 가고 있다.
"여러 사람과 일할 때 '내가 대표니까 내 말 들어,' '내 스타일 대로 해'라고 하지 않아요. 사람을 키우는 일은 두려움을 주어서 되지 않고 사랑으로만 됩니다. 저는 그들이 자신의 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물 주는 일만 할 뿐이에요. 우리 회사에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좀 있지만, 우리의 믿는 모습을 보고 교회와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일도, 음악과 함께, 하나님이 제게 주신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큰 일을 해내길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사람을 낚는 어부, 복음의 증인이 되길 원하시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