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인가 이곳저곳에서 개들을 만나면 가까이 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을 것을 주곤 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다음 언제나 남은 음식을 비닐 봉지에 싸 가지고 다니다가 길가나 집 근처에서 만나는 개들에게 다가가서 먹을 것을 주곤 했다. 내가 만난 개들은 그들의 배경이나 신분이나 모양이나 성격과 상관 없이, 내가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을 것을 주면 곧 부드러워져서 반가움을 표시하며 먹을 것을 받아 먹곤 했다.
좀 사나운 개들도 있다. 그러나 곧 태도가 바뀐다. 교역자들과 함께 이따금씩 동해 바다에 가서 놀곤 했는데 동해바다 식당 근처에는 언제나 커다란 개들이 있었다. 어느 곳의 개는 좀 사나워서 교역자들이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내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좀 사나워 보이는 개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을 것을 주면 곧 사나운 태도를 바꾸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다.
오래 전에 모스크바 교외의 어느 호텔에 며칠을 머문 일이 있었다. 호텔 뒤편에 사나워 보이는 아주 큰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호텔에서 식사를 한 다음 언제나 남은 음식을 싸 가지고 가서 그 사나워 보이는 큰 개에게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큰 개는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에 개의치 않고 다가가서 음식을 건네주었다. 그 개는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면서도 내가 주는 음식을 받아 먹었다. 하루 지나자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여전했지만 그 소리가 좀 작아졌다. 이틀이 지나자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여전했지만 더 작아졌다. 삼일 후부터는 아주 작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면서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관심과 친절과 사랑은 태도는 물론 목소리까지 바꾼다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 때 개에게 줄 남은 음식이 좀 부족할 때는 상점에 가서 소시지를 사다가 개에게 주기도 했다.
요사이 한국에는 전처럼 길가나 집 근처에서 개들을 많이 만날 수는 없지만 중국 연변 지역에는 지금도 개들이 길 거리와 집 근처에 많이 있다. 내가 거의 매년 연변지역을 방문하여 고아 아이들을 돌아보곤 하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개들에게도 음식을 주곤 했다. 최근에 내가 음식을 먹은 후 남은 음식을 비닐봉지에 넣자 나와 동행한 현지인이 개들에게 주려고 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더니 작년에도 내가 개들에게 먹을 것을 주곤 해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훈춘의 어느 농장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식탁에 놓여있는 남은 음식들을 봉지에 싸 가지고 농장 이곳 저곳에 있는 크고 작은 개들에게 나누어준 일이 있었다. 그 개들이 내가 다시 지나가면 나를 바라보면서 더 달라는 애타는 모습과 소리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최근에 내가 집사람과 제자 목사 부부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수지 근처 광교 산에 오른 일이 있었다. 산 중턱에 오르자 큰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주변에는 집도 없었고 사람들도 없었다. 어디서 온 개인지 모른다. 나는 즉시 그 개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경계를 하는 듯하더니 곧 안심하고 내 손에 자신을 맡겼다. 한 참 머리와 목을 쓰다듬어주니까 조금 후에는 자기의 온 몸을 나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아예 내 앞에 들어 누어서 내가 자기의 온 몸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앞에 들어 누운 개의 머리와 목과 가슴과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피차 즐거움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그 때 찍은 재미 있는 사진들이 있다.
개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요사이 한국에는 전처럼 길 거리나 집 근처에서 개들을 많이 만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길 거리나 집 근처에서 고양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식당에서 싸 가지고 나온 남은 음식들이 자연히 개들에게서 고양이에게로 옮겨 가게 되었다. 고양이는 개와는 좀 다른 동물이라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모두를 경계하는 좀 예민한 동물이기는 하다. 그러나 먹을 것을 주면 아주 좋아한다. 달려들면서까지, 때로는 소리를 지르면서까지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수지 집 앞에 조그만 산이 있는데 그 산에 사는 고양이들 대 여섯 마리가 있다. 최근에는 새끼를 서너 마리 낳았다. 내가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시작했는데 내가 외출했다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차 소리를 알아듣고 고양이들이 달려온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비닐 봉지에 싸 가지고 온 고기나 생선 남은 것들을 고양이들에게 던져주면 모두 달려 들어 맛있게 먹는다. 음식 남은 것들이 없을 때는 차 트렁크 속에 넣고 다니는 참치캔을 뜯어서 던져주곤 하는데 고양이들은 참치를 그 무엇보다 제일 좋아한다. 보통 음식을 던져주면 입에 물고 어디론가 뛰어 가서 먹은 다음 다시 와서 먹는데 참치를 주면 뛰어가지도 않고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이 그 자리에 함께 머물면서 국물까지 다 먹어 치운다.
몇 년 전에 일본에 며칠 다녀온 일이 있었다. 마지막 날 일본 교회의 목사님들이 나를 환송하며 식사 대접을 극진하게 했다. 일본에서 보통 때는 남는 음식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날엔 식탁에 남은 음식이 많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남은 생선들을 비닐 봉지에 싸기 시작했다. 일본 목사님들이 그것을 왜 싸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맛있는 일본 음식을 한국에 있는 고양이들에게 가져다 주려고 싼다고 했다. 그랬더니 코리언 고양이들이 자파니즈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남은 음식을 모두 다 싸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까지 무사히 가지고 왔다. 사실 음식물을 싸 가지고 비행기를 타면 안 되는데 일본 공항에서도 한국 공항에서도 무사히 통과되었다. 수지 집에 도착하자 마자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생선 음식을 한국 고양이들에게 건네주었더니 너무너무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가! 아마 무슨 잔치 날 음식인줄 줄 알고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개들과 고양이뿐은 아니다. 나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곤 하는데 새들도 먹이를 주는 나에게 달려 든다. 남아공의 높은 산에서도 모스크바의 호텔 근처 나무숲에서도 제주도의 숲 길에서도 서해 바다의 뱃길에서도 부산의 해운대 해변에서도 아니 수서 사무실 근처에서도 새우깡 같은 새들의 먹이를 던져주면 새들이 떼를 지어 나에게 달려든다. 해운대 해변에 갈 때마다 새우깡을 몇 봉지씩 사서 해변의 갈매기와 비둘기들에게 던져주곤 하는데 해변의 갈매기와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나에게 달려들곤 한다. 해변의 비둘기들 두 세 마리가 아예 새우깡을 던져주는 내 팔 위에 함께 올라 앉아서 새우깡을 받아먹곤 한다. 그러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내 팔 위에 앉아서 새우깡을 받아 먹는 두 세 마리의 새들을 구경한다. 그 때 찍은 재미 있는 사진들이 여러 장 있다. 수서 사무실 근처의 고층 빌딩에 비둘기들이 머물고 있는데 점심 먹은 후 이따금씩 빌딩 근처에 가서 새우깡을 주려고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즉시 비둘기들 수 십 마리가 떼를 지어 날아온다. 그 때 찍은 재미 있는 사진들이 있다.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도 자기들에게 친절한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펴며 먹을 것을 주려고 하면 그것을 즉시 알아차리고 달려드는 것이다. 나는 작년(2010년) 늦은 여름에 제주도 바다에서 재미 있는 경험을 한 일이 있다. 늦은 여름이라 바다에 들어가기가 좀 서늘했지만 산과 바다를 아주 좋아하는 나는 바다에 뛰어 들어갔다. (사실 오래 전에 이른 봄이라 물이 좀 서늘했는데도 불구하고 밧모섬 바다에 뛰어 들어가서 수영을 한 일도 있었다.) 서늘한 제주도 바다에 들어가서 한참 수영을 하는데 손 바닥 크기의 물고기 한 마리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 옆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 물고기를 나의 두 손 안에 넣었다. 물론 물 안에서였다. 그 물고기는 내 두 손안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더니 옆으로 들어 눕는 것이 아닌가! 조금 후에는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았다. 하도 이상해서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고 나는 헤엄을 쳐서 한 10미터 이상 되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 물고기가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다시 그 물고기를 나의 두 손 안에 넣었다. 물론 물 안에서였다. 그 물고기는 내 두 손안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더니 다시 옆으로 들어 눕는 것이 아닌가! 조금 후에는 다시 잠을 자는 것과 같았다.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물고기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이러는가?” “지금 이 물고기가 엄마를 잃은 것은 아닌가?” “지금 이 물고기가 집을 잃은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 물로기를 두 손 안에 넣은 대로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해변 얕은 물에 그 물고기를 놓아주었다. 여기서 좀 쉬든지 엄마를 찾든지 집을 찾아가라고 타일렀다. 물고기도 친절하게 대하면 그렇게 순해지는가?
그러면 이제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다. 나는 식물과 꽃들을 아주 좋아한다.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는 내 사무실에 각종 식물과 꽃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고 은퇴한 후 지금 있는 수서 사무실에도 식물과 꽃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는 란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와 꽃들이 내 사무실에서는 아주 싱싱하고 예쁘게 잘 자란다. 5,6개월마다 란들이 꽃을 피우기도 한다. 나무와 꽃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손길을 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강변교회 사무실에 있을 때는 꽃을 피우기가 어려운 행운 목까지 꽃을 피웠는데 그 짙은 꽃 향기가 사무실 방안은 물론 사무실 주변에까지 한 주간 이상 진동했다. 나는 행운 목의 가지를 잘라서 행운 목 자녀들을 만들었고 그 행운 목 자녀들로부터 행운 목 손주들까지 만들었는데 지금 수서 사무실에 있는 행운 목은 손주 뻘이 되는 행운 목이다. 강변교회당에서 자라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행운 목은 자손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흐뭇해 할 것이다.
나는 산들과 바다와 자연을 아주 좋아한다. 나는 은퇴 후 지난 3년 6개월 동안 주일마다 또는 주중에도 전국의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여 예배 드리며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곳 저곳에 펼쳐져 있는 산들과 울창한 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했다. 충청도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와 강원도와 거제도 등지에 펼쳐져 있는 산들과 울창한 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했다. 나는 가끔 바람에 몸이 흔들려 춤을 추는 울창한 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울창한 나무 숲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곤 했다. 그래서 시편 148편을 속으로 읊기도 했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시148:9-13).
나는 산들과 해변을 거닐 때마다 거의 잊지 않고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산 속이나 해변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들을 주워가지고 오는 일이다. 산을 올라갈 때는 커다란 쓰레기 봉지들을 주머니에 넣고 올라간다. 설악산 비룡 폭포를 오르고 내릴 때도, 제주도의 해변이나 숲 속을 거닐 때도. 서해안 외목 마을의 산을 오르고 내릴 때도, 태국의 해변을 거닐 때도, 사할린의 숲 속을 거닐 때도, 나는 쓰레기를 주워가지고 오곤 했다. 설악산 비룡 폭포를 오르고 내릴 때 쓰레기를 담은 커다란 봉지를 가지고 내려올 때마다 산 아래 상점 주인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쓰레기를 주워가지고 오느냐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제주도의 해변이나 숲 속을 거닐 때 나와 함께 동행하던 합신의 제자들도 할 수 없이 쓰레기를 주웠다. 외목 마을의 산을 내려오면서 쓰레기를 담은 봉지를 산 아래 파출소 쓰레기통에 넣자 파출소의 경찰이 나에게 다가와서 고마워하면서 나의 이름과 직업과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어느 해 뜨거운 여름 태국 좀티엔의 해변을 거닐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해파리 이백 여 마리를 김종군 목사와 함께 잡아다가 근처 호텔 관리인에게 준 일도 있었는데 너무너무 고마워했다. 구 소련 선교대회가 열린 사할린의 숲 속을 날마다 고 이중표 목사님과 함께 거닐면서 친밀한 교제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그 때도 매일 쓰레기를 주워서 가지고 내려오곤 했다. 나는 쓰레기를 주워가지고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자연을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아름답게 돌아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국내외의 호텔에 며칠 동안 묵을 때는 침대나 수건을 갈지도 말고 청소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Do not clean” 이나 “Do not disturb”라는 푯말을 반드시 문밖에 걸곤 한다. 사실 집에서는 침대의 이불이나 시트를 매일 갈지도 않고 수건도 매일 바꾸지도 않는다. 나는 집에서도 수건을 이틀 동안 쓴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수건들을 골고루 사용하면 삼 사일 정도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침대의 이불이나 시트나 수건들을 매일 세탁하면 그만큼 물이 오염될 것이고 지구가 오염될 것이다. 수년 전에 나의 제자인 최 모 목사와 일본 어느 호텔의 같은 방에서 며칠을 잤는데 아침에 우리가 방을 나오려고 할 때 나보고 먼저 나가라고 했다. “Do not clean” 이나 “Do not disturb”라는 푯말을 걸지 못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치를 채고 제자보고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을 사랑하고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Do not clean” 이나 “Do not disturb”라는 푯말을 건다고 설명을 했더니 결국 내 말에 할 수 없이 굴복하고 말았다. 한 마디 더 하면 나는 호텔에서 나올 때는 반드시 팁을 놓는 데 좀 넉넉하게 놓으면 그 다음 날 방에 고맙다는 카드와 꽃이 놓여있는 경우도 있고 제네바의 어느 숙소를 나오려 할 때는 숙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다음에도 꼭 오라는 말을 친절하게 했다. 조그만 친절이 친절과 고마움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설교나 강의보다는 순수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십여 년 이상 중국 연변 지역의 불우한 어린이들 180여 명을 돌아보고 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고아들이고 상당수의 어린이들의 어머니는 북으로 잡혀갔다. 나는 지난 십여 년 동안 거의 매년 연변 지역을 방문하며 어린 학생들과 저들을 관리하는 지역 회장들을 만나며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그동안 설교한 일도 없고 전도한 일도 없다.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지역 회장들이 추천하는 어린이들에게 매달 5만원씩의 후원금을 보냈고 지역 회장들이 추천하는 6,7명 학생들의 학비를 후원한 일뿐이다. 한국의 여러 교회들과 성도들이 보내온 후원금을 전달한 것뿐이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면서부터 지역회장들의 입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들이 흘러나왔고 수 많은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지역의 교회에 나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나를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저들을 방문할 때마다 너무 반가워하며 내 품에 안기는 학생들을 바라볼 때 나는 무한한 보람과 기쁨을 누린다. 그리고 저들은 할아버지처럼 자기들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착한 사람들이 되겠다고 다짐도 한다. 사랑보다 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배우고 또 배우게 된다.
나는 ‘악의 축’이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을 두 번 방문한 일이 있다. 첫 번 방문은 2003년 7월이었다. 나는 그 때 50도의 뜨거운 열기와 먼지투성이 속을 걷고 달리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한국교회가 세워준 3개 학교의 개교행사에 참여하면서, 내가 가지고 간 학용품 선물 가방들을 받아 들고 기뻐하는 수 많은 어린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학교 하나만 더 지어줄 수 없느냐고 나에게 다가와서 간청하는 압둘라우 장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프간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9.11사건 이후 모슬렘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꾸어진 탓도 있다. 결국 나는 2년 동안 강변교회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스지역 무라취흐 마을에 학교를 하나 세울 수 있었고 이 학교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아프간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황폐한 땅 아프간에 사는 어린이들을 잊을 수 없어서 1,400만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2005년 12월 15일 밤 타직과 아프간의 국경을 넘어 ‘지옥’과 같은 아프간에 갔다. 타직과 아프간의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우즈벡에서 15일 새벽 3시에 떠나 자동차로 23시간을 달려서 우여곡절 끝에 즉 국경수비 군인들을 억지로 설득한 끝에 타직과 아프간 국경을 넘은 후 또 달리고 달려서 16일 새벽 2시경 아프간 쿤두스에 도착했다. 16일 아침 10시 무라취흐 학교 준공식을 거행했다. 400여명의 어린이들과 100여명의 지역 지도자들이 학교로 들어가는 길 좌우편에 길게 서서 우리 일행을 열렬하게 환호했다. 10여 미터를 지날 때 마다 10여명의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종이로 만든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면서 우리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이윽고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주지사와 교육감등의 환영사가 있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환영사였다.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발음이 정확한 한국말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400여명 학생들에게 Korean Church 라는 글이 인쇄된 가방과 티셔츠와 학용품 선물을 나눠주었을 때 저들은 너무너무 좋아했다. 가난의 빛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귀엽고 예쁜 얼굴들에 행복한 웃음들이 꽃 피어나고 있었다. 사랑 앞에는 정치적인 이념도 종교적인 이념도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귀로 온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사랑보다 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배우고 또 배우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도말시켜 주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며 돌아보신 것처럼, 나도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사도 바울과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본받아서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과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있는 곳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심고 분열과 갈등과 대결이 있는 곳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심는 작은 거름과 씨앗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기 전에 주님이 지니셨던 긍휼의 눈물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품으셨던 사랑의 심장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지니셨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게 하시옵소서!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와 순교자들이 흘린 충성의 피를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인자와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와 한국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동포들과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2011년3월29일).
글ㅣ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