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미세먼지 탓에 연초부터 하늘이 희뿌연 것이 꼭 잿빛 새해를 닮았습니다. 전문가들의 새해 전망은 한결같이 비관적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발 수소폭탄 보도까지 나오면서 더욱 심란해진 새해 벽두입니다.
요즘 다들 우리가 사는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이 위기에서 세상을 구할 의인이 없다는 게 더 큰 위기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롬 3:10)고 했는데,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능력이나 사람됨에도 크게 기대할 게 없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막말로 나를 봐서 내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호소할 수도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절망하며 체념 속에 그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하신 의인이라는 것과 그분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몸이라고 하고 우리를 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의인일 수는 없지만 의인의 한 작은 지체일 수는 있다면 무너진 성을 다시 쌓고 뚫어진 구멍을 막아 보려는 몸짓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미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린 소돔을 두고 하나님과 치열하게 밀당을 벌이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우선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만일 이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오십을 위해 전체를 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에누리를 계속하다 마지막에는 십 명까지 내려가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십 명으로 인해 내가 이 성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노와 심판의 신이시기 전에 용서하시고 살리시는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사상입니다. <너희는 빨리 예루살렘 거리에 두루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 보아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아브라함도 감히 한 사람까지는 내려오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는다면 내가 내 진노를 철회할테니 <제발 나를 좀 도와 달라!>고 하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겔 22:30-31). 이 또한 <나로 분을 품지 못하게 할 한 사람>, 뚫린 구멍을 가로 막고 서서 <안 됩니다!> 하는 한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은 심판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의인이란 전체 속에 매몰된 존재가 아니라 전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책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너진 성을 쌓고, 그 뚫린 구멍을 자기의 온몸으로 가로막고 서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하는 자가 바로 의인이며 지금도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의인 한 사람을 애타게 찾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온 세상이 다 미쳐 돌아가는 마당에 나 혼자만 의인으로 남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는 개인이란 참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역학 위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세상의 기상도에 따라 약해지거나 강해지거나 희망 혹은 절망이 교차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라는 분, 자신의 몸을 던져 뚫어진 성을 가로막다 죽으신 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며, 지금도 오직 한 사람의 의인을 찾아 이 땅, 우리 사회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 신앙에 발을 디디고 선 사람들입니다.
다 포기하고 돌아서니까 나도 떠나겠다가 아니라 나 혼자서라도 저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고 뚫어진 구멍을 막아 보겠다는 의인 한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병신년 새해입니다.
/노나라의 별이 보내는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