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은 말씀과 함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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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ㅣ경기도 성남 만나교회ㅣ주일 1부 예배

▲성경본문

◇ 출애굽기 3장 13-14절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기독일보=주일설교] 2016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해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성령님에 대하여 공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아는지 첫 시간에 나누고, 이어서 6주 동안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그분을 알아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는 함께했던 제자들을 통해 경험된 예수님을 우리도 같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에 대하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앎을 통하여 성령님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의 주제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는 제가 지난해에 읽었던 마이크 어의 [하나님께 놀라다]라는 책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특정한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하나님 이해에 대한 부분을 나누겠습니다.

◆ 하나님을 모른다고 인정하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시작하는 2016년, 저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인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신앙을 가지면서부터 우리의 최대 고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내가 아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했던 교만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인생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싫은 일'일 수도 있죠?

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은 소위 '소통'이라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속 시원하게 대화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속 시원하게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나요? 누군가와 소통을 원한다면 언제 소통이 되었다고 느끼나요? 불행하게도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상대방과 소통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의 삶에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해결할 수 없는 불신앙과 공존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 신앙의 노력이 참 중요하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백이 따라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음이 진정으로 고백 될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요?중세 스콜라 신학의 거두였던 안셀름은 소위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 그 이상이다!"라고 하나님을 정의했죠.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하지만 결국은 '신비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안셀름을 이어 중세 신학과 철학의 거두인 성 아퀴나스는 소위 '우주론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고, 그것을 찾고, 찾아가면 제1의 원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제1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그렇게 알 수 있나요?

저에게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아니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요. 그런데 모르면 모를수록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하나님은 저의 생각과 지식을 가지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정말 위대하시다고요."

갑자기 [꿈이 있는 자유]가 부른 '소원'이라는 찬양이 생각나는군요. 지난 수요일에 한웅재 목사님이 오셔서 불렀던 찬양입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구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노래 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사랑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내가 하나님을 모릅니다!'라는 말은 그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간절한 고백이고 바람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나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내 삶에 인정된다는 신앙의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 여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를 원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언어 훈련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네 가정에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아들 셋, 딸 하나를 둔 언니가 그만 병들어 세상을 떠나더니, 곧 그 남편마저 죽었습니다. 졸지에 아이 넷을 떠맡게 된 그녀는 도저히 아이들을 남기고 선교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인도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지 못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믿음으로 정성껏 키웠습니다. 25년 후, 4명의 아이 중 세 명이 인도 선교사를 자원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선교본부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25년 만에 세 배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저희 세 자녀를 인도로 파송해주세요."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시간은 내 시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뜻을 초월해서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고 나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내 인식의 한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사실 '의심'이라는 것은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내 지식과 인식의 한계를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요?

출애굽기 3장은 유명한 모세의 소명장입니다. 모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호렙 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일을 모세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고 음성을 들었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 그에게 누가 이러한 사명을 너에게 주었느냐고 물을 때 대답해야 할 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너를 보낸 하나님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그 삶의 본질이나 성품과 같은 정체성을 표현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이름'은 어떤 직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공식적인 내용이 아니라 이름을 통해 친숙함과 관계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신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I am who I am'이라는 말로 '나는 나다!'라는 말이죠.

'나는 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누구 때문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누구에 의해 지음 받으신 분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과거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경험도 뛰어넘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논쟁하거나 논리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하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 말고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보여주시지 않은 수없이 많은 일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굳게 믿는 순간, 물질의 궁핍함이 올 때 하나님을 부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든 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으로만 믿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질병 때문에 우리는 당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질병 가운데 가장 친밀한 하나님을 만나게 될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는 직장과 학교에 보내주시는 분이라고 굳게 믿을 때,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많은 거절은 우리를 무척 당황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하게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요? 내가 알 수 있고, 내가 알고자 하는 지식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사랑의 관계 속에 빠진 그분입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별개의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원하지 않는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고백은 '지혜의 눈'을 여는 열쇠입니다.

만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인생의 고달픈 일을 당할 때, 슬프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점점 하나님과 멀어질 때, '좌절'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하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인간들의 죄와 아픔을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좌절과 고통은 회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해 우리 인생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를 계속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 스스로 계시다는 것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다는 것은 그분이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계시다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혹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는 순간!" 마치 우리가 다른 일로 바쁘다가 열심히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인 것처럼, 혹은 우리가 열심히 간구하고 부르짖고 나서야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아마도 이사야 45장 15절에 있는 말씀이야말로 이런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의 숨어계심은 우리를 버리심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지 못하도록 놀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참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합니다. 술래가 눈을 감습니다. 아이들은 다 흩어져서 술래가 찾지 못하도록 숨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그런데 가만히 보면 숨바꼭질을 한다는 것이 '비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술래에게 최선을 다하여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숨으심은 '존재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는 예배드리는 이 순간이 그런 한탄의 시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 어디 계신가요? 왜 내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재를 느껴야 하는 어둠 속을 달려가야 하나요? 왜 제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홀로 두려워해야 하나요?"

시편 기자도 자기 인생의 심연에서 암흑과 같은 시절을 지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편 10편 1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편 13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가지 숨기시겠나이까"

그런데 오늘 이런 신앙의 고백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를 누리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그분의 명백한 부재 역시 경험해야 하고 그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여정임을 배워야 한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숨으심 '부재'를 느낄 때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숨으심이 혹,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숨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은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길을 떠나 죄의 길을 가고 있을 때, 명백하게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런 불의함 가운데 우리가 애써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요즘 일어나는 크리스천들의 다툼과 교회의 분쟁, 크리스천들의 비도덕적인 일들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얼마 전 방송을 보는데, [유신 시대의 남자들]이라는 시사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박정희 시대의 2인자로 살았던 사람들의 말로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권력 투쟁과 암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특별히 이해할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가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냈던 '차지철'이라는 인물입니다.

당시 권력의 실세들이 육사를 나와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사람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일반 포병장교 중령 출신으로 권력의 핵심에 앉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얼마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는지, 그의 우직함을 보고 육영수 여사가 추천했다고 하죠.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의 삶에서 '하나님 임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권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사람을 멸시하고, 결국에는 수치심을 느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을 들어 대통령을 시해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서 하나님의 자취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수많은 크리스천과 교회에서 나타나는 '숨어계신 하나님' 현상은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해서 생긴 일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의 숨어계심은 하나님의 때와 응답이 무르익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거나 일을 시작하지 않으시므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때가 차매'라는 표현이 종종 나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5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숨어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지하게 하나님의 때를 생각해 보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게 만든다는 것을 말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진지하게 하나님을 알기 위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게 합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보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나님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계기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스펙터클한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으로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늘 하나님이 보고 싶고,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그와 반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시는 일을 하시도록 요구하고, 그분을 관리하고, 때로는 신앙을 조작하기도 합니다. 무서운 일이죠.

마이크 어 [하나님께 놀라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돈을 드리면 나에게 복이 돌아오고, 매일 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순탄하게 잘 자라고, 혼전 순결을 지키면 결혼 후에 멋진 성생활을 누리게 될 거라고 기대한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분명하고 쉬우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과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으면 '믿음'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공식에 따라 살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 측 계약 조건을 지키면 하나님은 그분의 조건을 지키실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위기관리에 가깝다. ...

자기보다 작은 상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는 난관을 관리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제어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믿음도 억누르게 된다. ...

하나님이 우리를 전투로 부르실 때는 우리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강한 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너끈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상대에게 이기면 자기가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전보다 더 값진 것을 위해 살기를 바라신다.

◆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알았던 하나님은 아주 '관념적'인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하나님의 지식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사람의 음성만 들으면 알 수 있도록, 억양, 톤, 말하는 스타일, 게다가 그 사람의 외모와 사회적 배경까지 말입니다. 그런 내 설명을 듣고 누군가 내가 소개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알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음성을 직접 듣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 '복면 가왕'이라는 프로가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물론 노래를 하는 가수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것은 얼굴을 가리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죠.

참관인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동원해 누구인지 추측합니다. 그런데 간혹 그 사람이 누군지 쉽게 추측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 몸짓까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죠. 가려도 압니다. 왜냐하면,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숨기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진정한 관계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앎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뢰의 시간이 쌓여서 관계가 형성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아는 방법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소홀히 하거나 귀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종종 삶에서 아주 비범한 것이 아니면, 아주 커다란 사건만을 기대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신문과 뉴스를 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뭔가 큰일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싱겁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눈길을 끌 만한 큰 사건보다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평범한 일들이 더욱 중요합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극적인 일에 심취하다 보면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하는 봉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종종 끓어오르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세상을 확 바꾸고 싶다!'

아주 불행한 것은 극적인 것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으려는 순간, 참으로 많은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놓치고 만다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영적 집회에서 일어나는 황홀한 일과 은사에 집중한다면, 그러한 체험이 없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얼마나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어떤 통계에 의하면 새로운 집으로 이사해 가지는 만족감은 삼 개월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승진의 기쁨 역시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내가 좋은 직장과 좋은 학교에 들어가 누리는 기쁨은 잠시지만, 그곳에서 해야만 하는 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 때문에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는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일을 통해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평범한 삶 가운데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이 올 때, 하나님이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시죠, 단지 우리가 그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은 분이십니다.

가장 우매한 지식 중의 하나가, 우리의 신학과 교파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참 재미있는 상상인데,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가 정해놓은 예배 순서를 따라 하실까요?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라고 정해놓은 그 방법대로 주님께서 움직이실까요?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놀랄 일이 별로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별로 기대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정말 깊숙이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별로 찾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있고, 어떤 순서가 진행되는지에 신경을 쓰지만 정작 주님이 그곳에 계실까에 무감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예상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닐까요?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은 종교인들이 관심을 두던 장소가 아니라, 슬퍼하는 자들의 곁에서, 병든 자들의 곁에서, 죄인들의 곁에서 늘 계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명확하게 주님을 알고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분명해지지 않나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 가장 명확하게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난해 고린도전서 강해를 하면서 저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입니다. 크리스천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시지 않으며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어떤 시험이 오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니면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생각할 때 충분히 우리가 감당할 시험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셔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시험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의 힘들고 절박한 곳에 이르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절박한 장소와 상황에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믿음이 작동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아주 밀접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종종 막막한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진 오해에서 벗어나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안전'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능력의 경험 한계를 경험하지 않으면 좀처럼 하나님을 찾거나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고통의 심연에 가장 뼈저리게 사랑의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랍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다가올 시험이 없음 때문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함께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특별한 곳에서가 아니,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광야의 깊은 곳에서 고통의 심연에서 우리가 더욱 친밀하게 만나시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곳에서 만나고 고백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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