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새해, 온 땅에 임할 평화(기복종교로는 사회변혁 할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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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목사 ©기장총회

1. 들어가며- 길을 예비하라

 

예언자 제2 이사야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3-4)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수께서 공 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에 세례 요한이라는 의인이 나타나 이사야의 글대로 앞서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요한이 입을 열면 당시의 부정 부패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정권의 실세들까지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피부를 긁어대는 불편한 가죽옷을 입고 무엇을 원하거나 바라지 않고 정의로운 말씀을 두려움 없이 쏟아냈습니다. 공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새로운 세상 나라, 평화의 나라는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 시대는 역사의 주권자 하나님과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합작할 때에야 새 시대 민주, 평등의 세상이, 평화의 나라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 강대국 간의 무기경쟁을 계속하고 있으며, 남북관계개선도 굳어져 있고, 한국사회는 부정 부패로 돈과 권력, 오만과 탐욕의 쇠사슬에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어찌 위기와 어둠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예언자 이사야의 임마누엘탄생의 역사적인 배경의 이야기와 샬롬과 팍스 로마나, 팍스 이코노미카의 진행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이어서 한국교회가 걸어온 긍정적인 면, 인권, 민주화 및 통일운동의 성찰과 부정적인 면, 기복신앙과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반성을 해 보겠습니다.

2. 임마누엘의 탄생과 배경의 역사이야기

때는 주전 733년, 앗시리아 대제국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시리아(아람 왕)과 이스라엘이 연합하고 다시 유대(남 왕국)를 그 연맹에 가담시키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했으므로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연합군은 돌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민심은 '광풍에 나뭇가지 흔들리듯' 동요되었습니다. 유대의 아하스 왕도 민심과 함께 질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을 향하여 "네가 믿지 아니하면 네가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사7:9) 하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기를 잃은 아하스 왕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모험한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충고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도 앗시리아 왕(디글랏 빌레셀)을 더 믿음성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신앙적인 아하스 왕에 대한 이사야의 분노는 폭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입에서는 저 유명한 메시야 예언인 "임마누엘의 탄생"이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제 이상 왕 메시야가 오십니다. 그는 너 '아하스 왕'과 같은 믿음 없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의 임재가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되는 하나님으로 충만하시다는 선포였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 아기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파괴되어 황폐하게 된 땅에서 백성들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사야가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이 아기를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말로 통치하는 왕을 지칭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9:1-7에 나오는 메시야 시는 그가 예언한 주제와 꼭 들어 맞습니다(또한 사 11:1-9보라). 아하스에 대한 이사야의 처음 예언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은 주전733-732년 앗시리아 왕(디글랏 빌레셀)이 스불론과 납달리(갈릴리)를 초토화시키고 이 지파들의 영지를 앗시리아 제국에 병합시켰을 때의 참상을 생각나게 하는 멸망과 어둠에 관한 묘사로 시작됩니다.그러나 이 어둠 속에서 큰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이사야로부터 이 예언은 예언전승의 흐름 속에 들어갔고 마침내 신약성서의 시대 기독교 복음의 새로운 열쇠가 되었습니다(마4:15-16).

3, 온 땅에 임할 평화

이사야 11장 1-9절, 특별히 6-9절은 생태적 평화가 이룩된 미래낙원에 대한 묘사로 자주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생태적 평화가 아니라 "이상 왕 메시아의 출현으로 이스라엘과 유대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임할 항구한 공의와 평화"를 묘사하는 본문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11장 2절은 그 새로운 지도자가 하나님의 영을 부여 받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상적 지도자가 중앙집권적 제왕이 아닌 왕조이전, 혹은 초기 왕조의 지도자를 연상하게 합니다. 사사 시대의 사사들이나 초기 왕조시대의 사울이나 다윗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 위에 내리는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임재는 그 지도자를 통한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지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9장 1-7절의 "평화의 왕"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덕목의 원천입니다.

이사야 11장 2절은 야웨의 영을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웨를 경외하는 영"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영은 두 가지로 요약 됩니다. 첫째는 "야웨를 경외하는 지혜의 영"을 뜻합니다. 잠언과 전도서와 같은 지혜문학에서 야웨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 것도 이와 상통합니다. 둘째는 "공의로 심판하는 총명의 영"을 뜻합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지혜의 동전 양면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간구할 때에 그 목적을 "하나님 백성 사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그는 실제로 지혜를 통해 백성을 공의로 판단하고 지혜로운 통치를 하였습니다(왕상 3:10).

결론적으로 이사야 11장 1-9절은 새로운 이상적 지도자의 출현으로 도래할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전쟁이 종식되고 궁극적인 창조질서가 실현된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영)에 의하여 실현될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은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인데 온 땅에 임할 평화의 나라와 가장 유사합니다. 그리고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전 부분을 지배하는 때에 가능해 집니다.

4. 샬롬과 팍스 로마나, 팍스 이코노미카

마태와 누가가 전하는 예수탄생 이야기는 폭군의 추격과 도피, 살해 당한 아기들과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있으며, 누가의 예수탄생 이야기에는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과 헤롯 사이의 갈등은 마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기이며, 누가에 의하면 이 아기는 로마제국과 유대 제사장들 같은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었습니다.

예수탄생의 역사적 배경에는 각각 민중의 평화인 '샬롬'과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 제국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민중의 평화인 '샬롬'에 대한 희망은 먼 조상 아브라함부터 이삭과 야곱, 열 두 아들에게로, 그리고 사라로부터 리브가, 라헬로 이어집니다. '살롬'은 구체적인 이름들과 지명들, 오랜 세월 습득해 온 삶의 규율들, 토착적인 평화, 민중의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팍스 로마나' 는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경계들, 민족적 경계와 자연적 경계, 모든 경계와 차이들을 폭력적으로 물리쳐 버리고 '제국'의 틀 안에 포섭한 평화이며, 전쟁과 전쟁 사이에 있는 가면적 인위적인 평화입니다. 따라서 마태와 누가의 예수탄생 이야기는 이 두 개의 평화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과 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마태가 모세출생 이야기를 염두에 두면서 예수탄생 이야기를 서술했다고 합니다. 모세가 탄생했을 때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가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듯이, 예수가 탄생했을 때는 로마제국의 졸개 헤롯이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또 헤롯이 죽은 뒤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마2:19-20) 명하는데, 이것 역시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야웨의 명령(출4:19)과 비슷합니다. 모세도, 예수도 출발부터 제국의 조직과 대립합니다. 마태는 일종의 원형적 해방사건인 출애굽을 자신의 예수이야기의 틀로 사용한 것입니다. 마태에 따르면, 아기 예수는 모세처럼 출애굽과 같은 해방사건을 일으킬 인물입니다. 이집트의 압제아래 신음하던 히브리인들이 그들을 이끌어 낼 해방자를 기다렸듯이, 로마와 유대 지배자들 아래서 고통 당하던 유대인들 역시 새로운 통치, 즉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나라를 기다렸습니다. 아기 예수는 이 기다림의 끝을 쥐고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역사는 끊임 없이 '샬롬'을 침탈해가는 역사였습니다. 베들레헴의 유아학살과 세금징수를 위한 호구 조사령은 인종과 문화와 자연적 차이를 넘어 '팍스 로마나'가 확대될 때 그것은 군사적, 경제적 폭력, 즉 전쟁을 수반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서는 아기 예수의 평화, 진정한 평화는 '팍스 로마나' 가 아니라 '샬롬' 이라고 하며, 결국에는 '샬롬' 이 승리한다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면, 이 믿음자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경제가 삶의 전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이제 전혀 다른 의미의 평화개념이 생겨 났습니다. 이반 일리치(Ivan IIIich, 1926-2002)라는 학자는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노예의 삶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평화개념을 '팍스 이코노미카' 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팍스 이코노미카'는 경제개발과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통해 추진됩니다. 경제개발은 민중의 자급적 문화를 변용시켜, 그것을 전 세계적 경제 시스템 속으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발은 언제나 민중의 자립, 자급적 활동이 희생되고, 공식적인 경제영역이 확대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민중의 평화는 희생시키고 팍스 이코노미카를 강요합니다. 대규모 토목공사, 생산성을 높이고 소비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는 정책들은 언제나 토착적인 민중의 삶을 파괴합니다.

오늘 우리는 삶의 가장 근원적 토대인 '땅의 평화'가 파괴되어가는 것, 생태적 위기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입에 밥과 물이 있어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물과 경작지, 숲, 깨끗한 공기 같은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팍스 이코노미카'는 '민중의 평화'의 토대인 '땅의 평화', 생태계를 파괴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삶에서 상품소비와 서비스에 대한 의존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2천년 전 갈릴리 예수가 말씀한 "가난하고 고르게 나눔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고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검소하고 가난하면서도 진실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오늘 살아 있음에 대하여 감사하며 예수님의 삶을 흠모하며 이웃 속에서 실천해가는 조용한 내적 변혁과 반향을 일으켜야 합니다.

5.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성찰과 반성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자취는 신라시대 네스토리우스 교도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이 교회를 세웠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로부터 천 년 뒤 청나라 연경에 갔던 이승훈이 자진해서 세례를 받았고, 이로써 한반도는 예수를 믿는 교인이 자생적으로 생긴 '기적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벽두부터 60여 년에 걸친 박해의 시기에 수 천명의 천주교인들이 십자가를 밟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택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 230여 년이지만, 개신교는 130여 년이 됩니다. 그것은 1884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인천에 상륙한 때로부터 계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벌써 만주로부터 서상륜, 일본으로부터 이수정이 우리자력으로 또는 우리의 자기 결단에 의하여 기독교를 우리민족의 종교로 삼았습니다.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100년 앞서 실학파 학자들에 의하여 수용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로만 보더라도 기독교는 외래종교라기보다 우리의 토착종교라 할 만큼 친근감이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 긍정적인 그 의미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인권, 민주화 및 통일운동에 관한 성찰과 반성입니다. 1961년 5월,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종래의 '민주정부'를 뒤엎어 버리자,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련과 과제를 안고 사회와 역사참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회고하면, 1960년대부터1980년대 말까지 약 30년간 군사정권하에서 한국교회는 그 존재감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단계는,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체결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교회는 정부의 '대일굴욕외교'에 항거하여 집단적인 움직임을 드러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강요 등 많은 고난을 당했던 한국교회가 국교타결 이전에 일제의 식민지배와 신앙탄압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대부분 한국교계가 뜻을 모았다는 것으로, 이는 정부의 대일외교자세가 이들을 설득시키지 못했을 정도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회고됩니다.

다음 단계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중심으로 인권,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한국교회의 이 같은 인권, 민주화 운동은 1976년 3월 1일, 천주교와 개신교 지도자들의 명동성당사건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비롯한 세계교회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에 유신정권이 끝나게 된 것은 이런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이 전개한 인권, 민주화 운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유신정권하에서 자기를 희생한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 만큼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시는 역사의 주,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깊이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합니다.

19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1970년대까지의 인권,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이 통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인식한 한국교회는 1980년대에 이르러 통일운동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는 한국교회가 통일운동에 선구적이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 시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통일운동은 한국의 민간통일운동의 효시를 이루었고, 그 동안 남북의 지배자만이 다룰 수 있다는 통일문제를, 그 통일을 앞으로 누리게 될 민중에게 귀속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 통일운동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운동은 해외에서와 국내에서 동시적으로 분단세력들의 반대의 난관을 극복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먼저 해외 거주 그리스도인들과 북과의 접촉이 시작되었습니다. 1981년부터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1차례의 회합을 가지며,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통일대화'도 통일운동의 좋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84년 11월에는 일본 도산소에서 WCC국제위원회 주최로 도산소협의회를 열고 한반도 통일은 남북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요지의 선언을 발표케 되었습니다. 이 무렵 WCC의 주선으로 1986년부터1988년, 1990년 세 차례에 걸쳐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한 교회가 통일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남북대표들은 만나 예배와 성찬예식을 거행,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됨을 확인했고, 광복 50년이 되는 1995년을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NCCK통일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한국교회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선언이었습니다. 죄책고백으로 시작된 이 선언은 '7.4공동성명'이 규정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통일원칙에 인도주의와 민주적 참여의 두 가지 원칙을 부가하여 5개의 통일원칙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 휴전선상의 무장의 감축과 한반도내의 핵무기 제거 등 남북한 정부가 수행할 정책과, 한국교회가 수행할 내용 등을 규정했습니다. 이 선언은 분단이래 한국교회가 주장한 통일의 기본원칙을 집약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회고하면, 인권, 민주화 및 통일운동은 한국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의문으로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저 부족하오니 역사의 주님! 오셔서 남북의 형제들을 하나로 묶어 주옵소서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6. 왜곡된 복사상과 이원적 삶에 대한 극복

한국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가져 왔습니다. 그 결과 1950년에 3,114개 교회가 1960년에는 5,011개, 1970년에는 12,866개, 1980년에는 21,234개, 1990년에는35,819개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장세의 교회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 성장이 둔화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성장 뒤에 후유증으로 나타난 복사상과 이원적 삶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복과는 무관한 복을 구하는 기복종교로 화했고, 거룩성·세속의 이원적 삶은 아직도 우리의 신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복의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입니다. 당시 새마을운동 '잘 살아보세' 운동을 할 때, 한국교회 일각에서도 요한3서2절을 인용, 복의 바람을 일으켜 3박자 축복, 3박자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를 양적 성장시키는 데에는 공헌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복 사상을 한국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도록 만들어 버렸고, 그 결과 한국교회는 또 하나의 기복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복종교로는 사회변혁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거룩성·세속의 이원론적 삶의 방식도 아무런 영향력을 사회에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도리어 우리사회의 걱정거리로 전락한 것과 다른 기복종교들처럼 사회를 개혁하는 힘을 거의 상실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적인 교훈으로 지적하자면, 한국교회가 머리털을 깎아버린 삼손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실천해야 할 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전 20:35)는 그 복입니다. 세속인들은 소유하고 더 얻는 것을 복되다고 합니다. 예수 따름 이들은 소유와 탐욕 중심의 복의 정의를 달리할 것을 요구합니다. 받는 것과 주는 것, 그 사이에서 더 복된 것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을 강조하고, 얻는 것보다 주는 것, 베품을 당하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복되다고 합니다.

주님과 사도들의 이 말씀은 소유중심의 일상적인 복 관념을 뒤집어 버립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에서는, 남에게 주고 실천하는 자가 많이 가진 자보다 복되며,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는 자보다 훨씬 복된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가난한자가 오히려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기막힌 반전이 가능하게 됩니다.

7. 나오면서- 새 해에 평화로의 기원

21세기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의와 양극화, 기후변화와 생태계파괴, 종교간 갈등과 충돌, 세대, 문화간 단절, 그리고 영적, 정신적 혼동 등,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심각한 위기의 시대로 경험되고 있습니다. 우리시대는 인간의 탐욕이 문명의 멸망을 재촉하고 심지어 우주적 종말까지 예견케 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생명의 길을 내놓으셨고, 이제 그만 전쟁과 폭력과 자기파멸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특별히 새해 실천과제는 남북관계를 화해와 평화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서 북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어리석은 의도를 지양해야 합니다. 70년 동안 남북대결의 험로에 용서와 화해, 평화통일의 통로를 깔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도를 한반도에서 실현하기 위해 이 땅의 모든 종교인 온 민족이 간절히 기원을 올리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고대의 그리스도교회와 개혁교회를 시작한 칼빈은 역사의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스스로 어머니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사랑으로 나라와 민중의 병을 치유하고, 온 누리가 서로 돕고 살리는 길로 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어머니교회의 자리는 사람의 혼의 깊은 자리, 모두를 품어 안고 있는 자리, 나라전체의 자리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마음자리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어머니 심정의 예언자적 시대정신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열어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일본과 중국을 이끌고 정의 평화의 향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온 땅에 임할 평화의 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가득 하기를 바랍니다.

글ㅣ이기영 목사(기장 총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