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방송연예·신앙] 주기철 목사의 삶이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조명되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전한 믿음과 삶이 주목받고 있다.
KBS1 TV는 25일 오후 10시 성탄 특집 다큐멘터리 ‘일사각오 주기철’(연출 권혁만)을 방송했다.
이번 다큐를 기획한 권혁만 PD는 “과거 독립운동가로서 주 목사의 면모뿐 아니라 현재 일본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측면을 조명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조명된 신앙인의 참된 본(本)을 보였던 '일사각오'(一死覺悟) 주기철 목사의 삶을 간단히 정리했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이념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하물며 주님을 믿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 하겠는가?"
경상남도 웅천 출신. 웅천에서 사립 개통소학교(開通小學校)를 거쳐,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 1916년 졸업한 주기철 목사.
주 목사는 다음 해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안질 때문에 곧 중퇴, 고향으로 돌아왔다.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하던 어느 날,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성령을 받고 중생(重生)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1921년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6년 졸업한 주기철 목사는 1926년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1931년 9월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 전국에 이름이 난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6년 여름, 송창근(宋昌根)의 후임으로서였다. 그때 그 교회에는 독립운동가로 후대에 이름을 알린 조만식(曺晩植)·유계준(劉啓俊)·오윤선(吳胤善) 장로 등이 출석하고 있었다.
주 목사는 도착하자 곧 교회당 건축에 착수하여 1938년 3월 헌당식을 가졌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헌당식 직전에 경찰에 검속(구속)됐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그가 평양에 부임하기 1년 전부터 평양교회와 신학교를 괴롭혔고, 결국 평양의 숭실 학교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각각 폐쇄됐다.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주기철 목사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마지막 설교로 교인들에게 전했다.
그의 마지막 '다섯 가지 기도'는 아래와 같다. (주기철 목사 마지막 설교 '바로가기' )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2)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3)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하였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됐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 사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순교했다.
한편, 정부는 주기철 목사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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