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저서 '소유냐 존재(삶)냐'(To Have or To Be)의 초판은 1996년 발행되었고 금년 들어 36쇄가 발행될 정도로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있다. 나는 초판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오늘날의 사회나 교회에 던져 주는 메시지 때문에 전보다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 생존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소유양식(지향), To have'과 '존재양식(지향), To be', 즉 소유론적 삶의 양식과 존재론적 삶의 양식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to do) 보다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to be)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독일 로마 가톨릭 신비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는 "인간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이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행복을 소유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것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물질, 더 많은 명예와 실력을 갖고 행복하려고 하지만, 결코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존재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어떤 환경과 생활의 여건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쾌락을 누리는 것, 동물적인 본능과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다. 인간의 행복, 그것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즐거움이다. 순간이 아닌 영원한 쾌감이며 느낌이다.
그러므로 진정 가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은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르게 사는 삶'과 '의미 있는 삶'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는 '바르게 살고 의미 있게 사는 것'보다 좀 더 많이 소유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소유중심의 삶을 살아왔다. 특히 현대를 이끌어가는 중심이념인 자본주의는 소유중심의 삶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살인, 전쟁, 폭력, 마약, 이혼 등 세계의 모든 불행한 사건들의 근본 원인은 소유욕이요, 탐욕에 있다. 그러므로 프롬은 소유중심의 삶 'to do'는 인류를 필연적으로 망하게 한다고 말하고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존재중심의 삶 'to be'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에게 소유론적 삶과 존재론적 삶을 제시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그때 사단은 거짓말로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라고 유혹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소유욕과 탐욕을 부추겼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최초부터 인간은 소유론적인 삶과 존재론적인 삶 가운데 소유론적인 삶을 택하였고, 그 결과 죽음과 재해 등 갖가지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소유론적인 삶을 택하도록 유혹하고 있고 사람들은 존재론적인 삶보다 소유론적인 삶의 양식을 선택하므로 파멸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면 인간에게 소유론적인 삶의 양식은 무시되어야 하는가? 결코 아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40일간 금식기도 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내용이 나온다.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소유론적인 삶을 택하게 하여 파멸로 몰아넣은 사단은 둘째 사람 예수님에게도 찾아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다. 역시 소유론적 삶을 부추긴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분석해 보면 예수님은 '산다'는 동사를 두 번 언급하셨다. 먼저의 '산다'는 동사는 육신의 떡으로 사는 소유론적 삶을 의미하고 다음의 '산다'는 동사는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존재론적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일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면 인간의 소유론적 삶을 부인 내지 무시하신 것이지만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소유론적인 삶을 존중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산다'는 동사를 두 번 말씀하심으로 "육신의 떡으로 사는 소유론적 삶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삶의 목적이 아닌 목표이고 말씀으로 사는 존재론적 삶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다"라고 확실히 구분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문제점은 삶의 목표와 목적이 바뀌어 버렸으며 존재론적 삶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의 삶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 이외의 모든 일들 즉 공부, 직장, 결혼, 가정, 사업 등등도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다만 그것들은 소유론적 삶의 목표이지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soli Deo Gloria)'이요,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먹고 마시고 그 외의 모든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을 소유론적 삶이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존재론적 삶이라고 한다.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다"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전 유럽을 점령하여 고대 로마제국의 재현을 꿈꾸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라는 섬에 유배되어 6년 후에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쓸쓸히 생을 마쳤다.
"저 대서양의 바닷물은 내가 흘린 눈물이요 저 육대주에 부는 바람은 나의 탄식 소리로다/나는 검으로 이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으나 이렇게 패배하고 말았도다/그러나 저 나사렛 예수는 사랑으로 전 세계를 정복하였도다/아아,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승자. 사랑은 강하도다/사랑은 검을 이기고 전 세계를 정복했도다."
소유론적인 삶을 살았던 패배자 나폴레옹은 비극적인 생을 마쳤지만, 존재론적인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셨다.
한국교회와 이 사회의 위기의 근본 원인은 사람들이 존재론적인 삶에서 소유론적 삶으로 바뀌어 버린 데 있다. 오늘날 경제적인 번영은 누리고 있지만, 사회와 가정은 급속도로 병들어 망가져 가고 있고 그 영향이 교회에도 스며들었다. 교회의 세속화로 인해 교회는 점점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목회자 등 교회의 리더들이 성 문제, 재물문제, 폭력문제, 세습문제 등에 연루되어 이제는 사회가 교회를 염려해야 할 정도로 병들어 가고 있다. 불명예스럽게도 OECD 국가 중에 한국은 이혼율 1위, 자살률 1위, 음주율 1위다.
의사를 포기하고 신부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내전이 펼쳐지고 있는 수단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실천하다 48세의 짧은 생을 보낸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이요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우는 이태석 신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영혼구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에콰도르, 그것도 남미의 살인부족이라고 알려져 있는 아우카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다 29세에 4명의 선교 동료와 함께 순교를 당한 짐 엘리엇(Jim Elliot, 1927~1956), 27세에 대동강 변 모래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선교사, 그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삶을 몸소 실천한 믿음과 선교의 영웅들이다. 선교는 실적이 아니라 삶이다.
전형구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바울선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