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칼럼] 보람을 창조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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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금천교회 이선규 목사] 한국인은 정(情)이 많은 민족 이라고 합니다. 정이란 비합리적인 감정에서 오는 것입니다.

정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는 느낄 수 없는 마음으로 부터 끈끈한 유대감이 있고 훈훈한 체 온이 있기 마련입니다.

개인주의가 첨예화한 서구 사회 에서는 인간관계가 법에 의하여 형성됩니다.

예를 들면 가장 가까운 부부 관계부터 인간적인 ‘정’의 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법적인 관계가 더 농후 하다는 말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그날부터 계약 속에서 사는 부부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정의 세계는 어질고 훈훈한 마음이 우선 합니다.

모든 일을 정만을 앞 세워 처리 하는 것도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의 문화를 이루 어온 우리 민족의 풍부한 감정은 정확성을 중시하던 조직적 산업 사회 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을 해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지만 앞으로는 이 풍부한 마음이 더 중요한 풀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리라고 확신 되어 집니다.

정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포괄하는 생명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모든 인간관계는 정으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빡빡한 현대 문명사회에서 정은 촉촉한 물기와 같은 것이어서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을 풍 여유를 갖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은 푸근한 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이 메마르면 사회는 그만큼 더 삭막해 지고 개개인은 저마다 단절감을 느껴 정신적 황폐감은 커져만 가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한 시대를 장식하고 가신 고(故)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평소에 정적으로 싸우다가도 큰 목표를 위해 함께하는 도량을 보여준 점에서 본인은 정이 지도자였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정을 강조하는 것은 ‘정’을 통하여 보람 있는 삶을 창출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휴대폰에서 ‘보람’이란 단어를 치니 한일이나 말에 대하여 돌아오는 좋은 결과나 본받을 만한 좋은 결과 등이 나와 있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보람 있는 삶이란 첫째는 자식을 낳아야 하고 좋은 글을 남겨야 하며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합니다.
한편 동양 사람들의 보람의 인식은 修身(수신-행실을 닦고 도덕을 공부하여 착한 사람 되기에 힘씀)이고 齋家(재가-집안을 잘 다스려 바로 잡음)이며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나라와 세상을 평안하게 다스리는 것)라고 합니다.

어느덧 금년도 년 말이 다가오고 성탄의 캐롤송도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기록한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 서)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어(엡6:20)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보람 있는 삶을 정의하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부끄럽지 아니하고’(빌1:20)라고 했습니다.

옛날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요한(John knox) 낙스가 세상을 떠나니 그의 무덤에 후세인들이 비석을 세우고 글을 쓰기를 ‘여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누어 잠을 잔다고 기록 했다고 합니다.

후세인들이 이와 같은 비문을 쓸 수 있도록 보람을 남기는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까?

나만의 공연한 생각이겠지? 나라를 위해 한 시대를 장식하며 헌신한 대통령의 장례식에 모든 국민의 뜻을 모아 마지막 가는 길을 예후해 드리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라 할지라도 권력과 명예를 한 몸에 지녔던 분들이 바울처럼 ‘내가 가진 모든 권한을 다 사용할 권한이 있을지라도 다 사용하지 않고 가지지 못한 분들을 위해 사용하기를 자제하겠노라’는 고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오직 전과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그리스도가 존 귀히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 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연말이 되면 예외 없이 구세군의 자선냄비의 종소리와 함께 우리 주변의 이웃을 생각게 하는 계절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 축사 하시고 질서대로 앉히시고 분부 하시는 말씀이 ‘그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 오천 명은 어떻게 해서든 함께 먹고 지내야 할 공동의 운명체였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많은 외국 단체와 선교사들에 많은 선교 지원과 은혜를 입고 오늘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오늘의 세계는 나라와 나라 자연과 지역이 서로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장벽을 허물고 서로 주고받고 해야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거시적인 견지에서 보면 나라도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도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들과 다 문화 가족들 소외 지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의 형제들을 돌아볼 때입니다.

그들은 내국인들이 외면하는 힘든 작업을 감당하는 소중한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듯이 무심해 왔지 않았나’ 나를 곰 곰 히 곱씹어 볼 시점입니다.

금년에 구로 지역의 몇몇 교회가 합심하여 구세군 냄비 2점을 인수하여 구로역과 디지 털 단지 역에서 사랑의 종을 울릴 예정입니다.

보람이 있는 일에 우리의 역량을 모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가기로 다짐하며 많은 관심과 협력이 있기를 소원하며 보람을 창조하는 연말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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