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이선규 편집위원] “교육의 위기는 인간의 위기이다”라는 말을 비유해서 시인(詩人) 엘리어트는 ‘텅빈 인간’이란 말을 하였고 콜린 윌슨은 ‘주체성과 내면성을 잃어버린 허수아비’란 말을 썼다.
이 말의 공통 개념은 인간의 알맹이를 뽑아 먹는 현대의 늑대들이 지금 한국이란 광야로 어 는 사이에 밀려와서 인간의 ‘혼(魂)’인 인격성을 모조리 박탈내고 절대 신(神)도, 도덕도 부재한 빈들에 내동댕이쳐 버린 현실을 상상하듯 교과서의 국정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좀 과장된 언어같이 들릴지 모르나 우리 사회에서 이 어마어마한 늑대의 세력과 대결하는 듯 이 보인다.
교육이야 말로 인간을 가책 없이 무(無)성격화 내지 무인간화 시켜가는 이 거센 흐름을 바꾸어 놓을 교육안이 논의 되어야 할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양측이 서로 이념 대립 양상만 대 두 되어가고 있는 현상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인간의 사회를 형성하게 하는 사명을 지닌 현실의 교육을 살펴보면 그 과정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교육을 통하여 붕괴 되어가는 인간을 격류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구출하여 알맹이가 들어찬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믿고 있다.
‘국정이냐’, ‘검정이냐’ 논의보다 먼저 우선 되어져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청소년은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다.
또한 그들은 자라나는 생명이다. 그들은 우리의 자녀들인 동시에 머지않아 우리가 이 나라와 이 사회를 그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청소년 문제가 심심찮게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것도 교육의 책임을 회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전에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소위 현대식 교육이란 일본의 식 민지 정책에 의한 교육이었기에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교육이라기보다 국가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인간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현 교과서 논쟁도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싱싱하고 명랑하게 성장해야 할 이 아이들에게 중학교, 그 중에도 일류(一流)라고 이름 지어진 학교를 물색하여 부모와 본인은 준비에 몰두해 왔고 그 조건에 맞는 지역을 찾아 부모는 희생을 무릎 쓰고 헤메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필자가 가까이에서 바라본 딸아이를 하나둔 어느 가정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일류에만 전전 긍긍하다 미국에 유학을 보냈는데 현장에 잘 적응하지 못해 국내에 들어왔다 또 미국으로 몇 번을 거듭하다가 다른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어 있는데도 아직 중졸에 그쳐 가정이 비상에 걸려있고 이 일로 행복한 가정에 웃음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경우를 보면서 부모들이 자녀를 대리하여 이루려고 하는 욕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합격을 못하고 떨어진 아이들의 심리적인 장애는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정상적인 교육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교 전체 생활을 통하여 생각하는 시간이나 자신의 인간을 만들어 가기위해 노력할 시간도 없고 참 삶의 가치를 상실한 채 방황하는 그들을 바로 잡아 주기위한 노력이 기왕 교과서집필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에서 주관자가 누구냐에 몰두하기보다 이 문제가 먼저 선행 되어야할 것이다.
‘무엇이 진리냐’하는 것이 문제시 되지 않고 ‘무엇이 더 실용적이냐’하는 것만 문제되고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더 쉽게 출세하고 성공 하는 길이냐’는 도구화되어 버린 지식을 사는 일에 몰두되어 있는 교육 현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만 할 것이다.
더욱이 정권의 입맛대로 획일적인 교과서를 염두에 두고 진행하는 일이나 기독교의 교육, 문화, 의료, 민주화 등을 무시한 채 일을 진행해 가려고 하는 의도도 좌시 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교육의 위기를 타개하여 올바른 인간을 형성하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학교는 남을지 지배하는 인간 도구를 제조해 내는 곳이 아니라 섬길 줄 아는 인간을 형성하는 전당(殿堂)이 되어야 한다.
편향되고 왜곡된 역사의 기록을 바로 잡는다는 데는 이의를 달수 없지만 그러다가 과거 굴절 된 역사를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을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교과서가 탄생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