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12> 인간들이 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렵게 여길 때, 죄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말했던 것들로부터 보면 아주 명백해진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비난하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너가 의롭게 되기 위하여 너의 악한 행실을 고백하라”(사 43:26절 참고)와 “너 자신을 악을 행하는 자들에 매달리게 하는 어떤 악에 너의 마음을 기울이게 하지 마라”(시편 141:4) (LW 31, 48)
루터는 앞선 논제 11에서 인간이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두려움을 가질 때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제 논제 12에서는 “인간들이 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렵게 여길 때, 죄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논제 11이 인간이 행한 행위에 관심한다면, 논제 12는 인간의 의지에 관심한다. 즉 우리는 행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의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중세 가톨릭 전통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한다: 1) 죄의 원인, 2) 죄의 효과, 3) 죄의 처벌, 4) 죄에 대한 희생제물, 5) 죄 때문에 영혼이 정죄당하는 죄책. 그러나 루터는 죄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구분에 대해 평가절하한다. 루터는 ‘죄’가 성경에서 한 가지 매우 단순한 의미로 사용되지,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로 말한다. 간략히 정의를 내리자면, “참으로 죄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지 않는 것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LW 32:195) 라고 말한다.
또한 루터는 죄의 경중에 따라 죄를 구분하는 중세 스콜라 전통도 거부한다. 중세 스콜라 전통에 의하면, “용서 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가 있는가 하면,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가 있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는 죄의 경중이 다소 작은 행위를 저질렀을 때 성립하는 죄를 말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다소 교란은 일어나지만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는다. 반면에 “죽음에 이르는 죄”는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법을 크게 거스른 행위를 저질렀을 때 성립하는 죄를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여기서 중세 가톨릭과 스콜라 전통의 죄에 대한 이러한 구분을 거부하고,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행위에 있어서나 의지에 있어 진실로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여길 때만이 죄는 진실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즉 인간은 죄로 인해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질 때 진실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죄에 두려움을 갖기만 한다면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아니다. 루터는 논제 12에 대한 부연 설명에서 이사야 43장 26절을 인용하며 우리의 악한 행실을 고백할 것을 강조한다. 즉 루터가 죄를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렵게 여기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심리적 두려움을 가진 자가 아니라, 그 두려운 마음으로 죄를 고백한 회개하는 죄인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한 두려움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부인하지 않고 시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일, 그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더해 주는 그런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단 죄를 범했으면, 그것을 시인하라. 하나님 앞에서 절대 부인하지 말라”(Table Talk of Martin Luther, CCLIV)
논제 12를 통해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된 모습으로 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제나 심판자의 모습으로 서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고, 자신의 죄된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기를 더 즐긴다. 루터는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이 죄를 짓고 저사람은 저 죄를 지었어 라고 말하기는 쉽다. 정작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Table Talk of Martin Luther, CCLIV)
한국 교회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세지를 보면, 죄에 대한 두려움과 진지한 성찰 없이 너무나 죄를 가볍게 다루어 지는 듯 보인다. 목회자들이 죄의 심각성 보다 그저, “하나님은 죄인들도 다 받아주시며, 그 분은 죄인들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이러한 설교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때로 죄를 지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죄에 대해 경히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죄인들도 다 받아주신다고? 그럼 죄를 짓자! 이런 가르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받아주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것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하신 것이다.”(Table Talk of Martin Luther, CCLVIII)
루터가 논제 12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두렵게 여겨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길이 없다.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의지함으로 하나님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는 죄의 회개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죄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는 95개 논제 첫 번째 조항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참회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LW 31:25)
우리의 모든 행위와 의지가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참된 희망은 없다. 인간의 행위와 감정 위에 세워진 것 안에는 희망이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참 소망이 있다. 이 역설의 방식이 바로 십자가의 방식임을 잊지 말자.
◈ 필자인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jjeong@zionbelleville.org 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