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민 칼럼] 시간을 잃어버린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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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성결교회 김종민 목사
김종민 목사ㅣ애틀랜타성결교회 담임

유치원에서 그린 아이들의 그림은 심오한 현대미술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어려운 미술사를 공부하지 않았어도, 선과 공간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도 걸작임에는 분명하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이성과 경험으로 재단하지 않은 날 것과 같은 인간 심연의 모습이 마치 고대 동굴 속 벽화와 같이 펼쳐진다. 해를 꼭 노란색으로 그리지 않아도, 손가락을 일일이 다섯 개씩 맞추지 않아도 별로 이상하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상식을 아이들의 그림에 갖다 대는 모습이 더욱 이상하게 보인다.

아이들 그림의 원천은 상상력이다. 제한 되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이야말로 창의력 샘이다. 아이들에게 그림의 구도와 색깔의 맞춤을 가르치는 순간부터 상상력은 그래야만 한다고 약속된 사회적 규율에 의해 점점 옅어져 간다.

그렇게 상상력을 제한 받고 조직 사회의 맞춤형 인간으로 재 조립 되면 어른이 된다. 그런 어른에게 사회는 다시 아이와 같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업무 성과로서 강요 받는 상상력은 현실의 그럴듯한 눈속임일 뿐이다.

새장을 멋지게 다시 장식한들 자유를 찾아 떠난 새를 다시 새장 안에 가둘 수 없듯이, 살아온 경험과 이성의 규제 속에서 갑자기 상상력이 샘솟을 일은 없다. 그렇다고 기억을 다 지우고 철없는 어린 아이의 행동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미 어른으로서 다시 한번 틀에 박히지 않은 시선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상상력과 창의력이 다시금 우리 머리 위를 맴돌 수 있게 만드는 유혹적인 먹잇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영상매체보다 독서를 권유하는 것은 텔레비전의 선정성이나 폭력성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원래적 목적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보호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알'과 같다. 그것에서 무엇이 나올지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그 알을 품고 관심의 물을 주고, 적당한 때가 되면 그 안에서 무엇을 끌어내야 할지 스스로 선택 하게 된다. 그러나 알을 보여주고 그 결과물인 새를 곧바로 보여준다면 상상력이 자라날 틈이 없다.

독서가 상상력을 보호한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을 벌어준다는 것이다. 독서는 영상매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 시간을 통해 아이들은 머릿속에 이미지를 상상해 낸다. 그리고 시간으로 상상력을 키워낸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상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모든 일들은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들뿐이다. 긴박한 현실은 시간을 갉아먹고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아이디어는 불현듯 떠오를 수 있지만 상상력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호흡이 길다. 급조된 상상력은 뒷면 없는 영화 세트장과 같다.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본질로서의 가치는 없다. 시간을 잃어버린 상상력은 환영에 불과하다. 환영은 현실을 속일 수는 있지만, 상상력은 삶의 가치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잃어버린 상상력의 기억을 되찾는 것은 쉽지는 않으나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상상력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건강과 소유와 지식은 현실에서 사람을 규정짓는 기준일지 몰라도, 상상력은 그 한계를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

이 날개를 찾기 위해서 갑자기 휴가를 내거나 사표를 쓸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은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이라도 충분하다. 인위적인 시간을 먹여서 상상력을 쥐어짜려는 것은 황금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똑같다.

자투리 시간에 영어단어 외우던 학창시절처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무엇인가 마음속에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이다. '이 나이에 쓸데 없이 별 생각을' 이라는 부끄러움은 날개가 돋는 동안 느껴지는 잠깐의 간지러움일 뿐이다. 몸을 멈추면 머리가 움직이고, 말을 멈추면 마음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시간의 투자가 상상력의 가치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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