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칼럼] 문맥(文脈)과 문맹(文盲) 사이

오피니언·칼럼
편집부 기자
▲백석대 채영삼 교수

비참한 일은, 오늘 날의 수많은 설교자, 정말 유명한 자들까지 포함해서, 성경 본문을 읽고 자기 하고 싶은 틀에 맞추어 설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맞는 점이 있지만, 부분이기 때문에 항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문자적 의미로는 그런 면이 있지만, 전후 문맥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해에 가까운 해석이 되어버리고 만다.

성경의 한 구절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맥이다. 우선 한 구절의 인접한 전후문맥만 들여다보아도 오해를 피할 길이 열린다. 더욱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더 폭넓은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마가복음이면 마가복음이라는 전체 문맥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마가복음 전체 문맥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고자 한 전체 사역의 일부였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사람, 그분의 기적의 권세를 경험한 사람은 역시, 그분을 따라 십자가의 길까지 따라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전체의 문맥 속에서, 부분을 보는 눈을 가지려면, 그래서 문맥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이다.

마가복음 11:20-25이 대표적 예이다. 23절에는 이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구절만 달랑 보면, 누구든지 어떤 일이 일어날 줄을 확신하는 신념, 긍정적 생각과 믿음이 1%라도 있으면 그대로 된다는 신념의 기적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24절은 더 하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래서 원하는 것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았다고 고백하면, 그대로 된다는 긍정적 신념의 기적을 가르치는 구절로 자주 사용된다. 그래서 그런 신념의 힘을 가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냐'라는 것이다. 한 술 더 뜰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신 후(13절), 뿌리부터 마른 것(20절)을 두고, '그거 봐라. 이런 긍정적 믿음이 없는 자는 이렇게 저주를 받는 것이다'라는 해석까지 덧붙이면 거의 황당무지 수준이다.

전후 문맥을 보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 저주하시는 사건의 문맥은, 곧 예루살렘의 돌이킬 수 없는 죄악과 이에 대한 임박한 심판이다. 대제사장들이 강도가 되었고, 성전이 강도들의 굴혈이 되었다(17절). 가장 거룩한 곳이 가장 세속적 탐욕과 정치적 모략으로 가득 찬 곳으로 변질 되었다. 예수님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변해버린 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어두시고 오래 기다렸지만, 열방 가운데서 그 나라의 의의 열매 맺기를 기다리셨지만, 끝내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이스라엘에게 이제, 드디어 심판을 선고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의 눈에도,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전혀 망할 것 같지 않았다. 시온 산 정상에 우람하게 서 있는 성전의 정문은 금딱지로 발라 놓아, 멀리서도 햇빛에 번쩍였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자랑이요 영광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거룩하시고 불꽃같은 눈에, 그 성전에 가득 했던 탐욕과 세속적 더러움은 스스로를 숨길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23절)라고 하셨을 때, 과연, '이 산'은 그 성전이 서 있던 시온 산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누가 70년 후에, 그 거룩한 성, 그 큰 건물이 무너지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누가 시온 산이 바다에 던져지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보면, 그런 거대한 건물 성전쯤은 얼마든지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다. 거기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했던 중보의 장소이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24절). 강조점은 '내가'에 놓여 있다. 이제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기도의 응답을 보장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 예수님이 '이 산 위에 서 있는 성전'을 대신하시는 '종말의 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무엇이든지'라고 하신 것은, 그래서 이제부터 모든 기도의 중보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선포이다. 예루살렘에 대해 심판은 선고하신 문맥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25절은 이것을 더욱 더 명확히 한다. 성전은 죄 사함을 받는 곳이다. 당시 성전은 헛된 제물에 가증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구해서 무엇이든 다 이루어지는 기도'(24절)는, 사실상 우선적으로, 죄 사함의 기도이며, 그리고 그것은 화해의 회개를 전제함을 가르치신다(25절). 그래서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기도는 우선적으로 용서와 화해의 기도이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그 응답이 거의 직방이다.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응답과 사죄의 은혜가 얼마든지 일어난다. 왜냐하면, 이제는 예수 안에 거하는 그 제자들, 곧 믿는 이들이, 예수 안에서 예수의 뜻을 따라 용서하고 용서받는 참 성전, 참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야말로 '(부패한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을 통째로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는 믿음' 곧, 건물성전을 대치하는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진 놀라운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보라. 마가복음 11:20-25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 문맥을 따라 읽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긍정신학, 신념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이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세속적 욕심을 따라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살짜리 어린아이가 면도날을 달라고 하면 주는 아버지는 없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주시지 않는다(약 4:1-4). 그런 것을 받는 것이 저주이다. 하나님 믿고 복 받고 망한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정죄하신 당시 예루살렘의 운명이었다. 그분이 저주하신 무화과의 운명이었다. 심겼고 피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열매는 없어서, 그래서 뿌리까지 마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세속적 신앙에 대한 이런 무시무시한 경고의 본문을 눈 뜨고 보면서도, 또 다시 이 본문을 세속적 신앙의 소원성취로 읽게 하는 능력, 그런 역사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문맥을 무시하면, 읽어도 문맹(文盲)이다. 보아도 보지 못한다. 읽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구렁텅이에 빠진다. 어쩌다가 더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게 되면, 그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듣고 싶은가? 한 구절을 떼서 자기 식으로 읽지 말고, 문맥을 읽으라. 전체 문맥을 보라. 더 나아가, 신약과 구약을 같이 읽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체 뜻과 계획, 그분의 성품 전체를 깨닫도록 애써야 한다. 그것이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그분을 사랑하는 일 아닌가. 그분을 참으로 예배하고 경외하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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