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흔들리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흔들리면 순간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날들이 다가 오고 있다. 이미 땅이 흔들리고 공중에서 바다에서 그 징조가 보이고 있다.
아침 신문에 보니 선진국이라 믿었던 그리스에서 구호 물품을 타기 위해 줄을 서있는 모습이 남의 나라일 같지 만은 않은 것 같다.
경제가 흔들리고 도덕이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오늘 내일의 일만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교회는 흔들리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교회마저 흔들리고 있다
개척 교회가 예전 같지 않다고들 아우성이고 중형 교회도 전도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고 대형 교회들조차 교회 내분으로 인한 진통이 만만치 않은가 보다.
그러면 왜 교회가 흔들리는 것일까? 그것은 기초가 바르지 않아서 그렇다.
찬송가 가사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라는 가사처럼 올바른 기초 즉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감히 누구인들 흔들자가 없다.
이러한 교회가 흔들림이 있다면 무엇인가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뿌리가 얕은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역사 소설을 읽다보면 다음과 문장이 흔히 나온다.
'말발굽에 밝히는 자 부지기 수더라 "전쟁을 하다보면 한쪽은 승승장구요 또한 쪽은 그 쫒기는 상황에서도 일패도지(日敗途地)라 표현되었음을 보게 된다.
이름 없는 무명초로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회고해 볼 여유조차 없이 먼지 속에 휩싸인 채 사라지는 모습이 서글픈 심정이었다.
승승장구 하던 군사들도 어느 때 인가는 패잔병의 신세로 전락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 시대를 구가하던 영웅호걸들도 한순간의 실수나 잘못된 판단으로 별 수 없이 무 그 모든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목불인견 이었다.
느헤미아 5:5이 떠오른다. '우리는 제 아들 딸 들을 종으로 팔아먹는 신세다. 딸들이 짓밟히는데도 우리는 어떻게 손쓸 힘이 없구나?' 귀향 이후의 이스라엘의 재건과정에서 겪었던 사회 불의에 대해 부르짖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보자. 정치에 있어 그 불의는 차마 귀담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다.
그리고 정치에 몸담고 있는 선량들은 그런 불의에 불감증 증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일반 서민층 들은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는 액수의 돈들로 불의를 자행 하면서 말로는 정의를 외치고 있으니 그저 참담하기만 하다.
진리의 터전위에 세워진 교회조차 정의와 하나님의 의를 외치는 소리는 모기 소리만큼이나 듣 기가 어려운 시대라면 과언이랄까?
불의에 대해 외치는 자 보기 힘들고 오히려 그들의 불의한 헌금의 출처는 살펴보지도 않은 채 축복의 음성은 크게 들리는 듯하다.
터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독일의 본 훼퍼는 불의와 비 진리에 맞서 싸우다 기득권자들의 음모에 죽어가면서도 그 진리를 사수 하였는데 오늘에 그러한 예언자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이 시대의 부정과 부패에 과감히 대처하며 날카로운 도덕적 판단력을 가져야 함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이며 절대 다수의 보통사람들에 대한 경외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왜곡된 역사의 흔적을 후손에 물려주지 않아야 할 자의 의무이다.
시편 11:3절에서도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고 하였다.
터가 무너지면 자칭 의인들이라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 할 일도 없는 천박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동성애 문제, 젊은이들의 탈선. 가정의 해체로 인한 신음 소리가 심상찮다.
터가 무너지기 전에 교회의 기초를 다시 돌아보자. 오늘아침 신문에 외래 종교에만 의존 하 지 말고 나라를 위해 헌화한 영령들을 위해 청와대에 제단을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고 한 면을 광고로 채웠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무너지기 전에 손 볼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글ㅣ이선규 목사(금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