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노 칼럼] 평화의 기도

오피니언·칼럼
편집부 기자
▲푸른교회 조성노 담임목사

어느 날 저녁 누군가가 프랜시스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문을 열자 얼굴이 몹시 흉하게 일그러진 나병환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춥고 배고프다며 잠시 쉬어 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프랜시스는 그를 방으로 안내하고 정성껏 식탁을 마련하여 대접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나환자가 다시 춥다며 당신의 체온을 좀 나눠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그 나환자를 꼭 껴안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프랜시스가 눈을 떴을 때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젯밤 그 나병환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은 프랜시스는 나병환자의 모습으로 자기를 찾아오신 주님께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게 저 유명한 성 프랜시스(1182-1226)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중세 가톨릭이 정교 유착으로 온갖 특권을 다 누리며 총체적으로 타락해가고 있을 때 청년 프랜시스는 1207년 다미아노 교회 십자가 아래서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교회를 다시 세워라!> 그 체험 후 프랜시스는 곧 탁발 수도회를 창설하여 위대한 개혁의 첫 발을 내디딥니다. 그가 표방한 것은 다시금 복음으로 돌아가 주님처럼 청빈과 겸손과 소박한 삶을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가톨릭이 앓고 있던 심각한 세 가지 병, 즉 부와 권력과 사치에 대한 극약 처방이었습니다. <제2의 예수>라고 불렸을 만큼 존경과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성 프랜시스의 그 수도회 운동은 그 후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난 중세 가톨릭의 쇄신 움직임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는 프랜시스의 영적인 동반자였던 클라라 수녀의 유해도 안치되어 있습니다. 성녀 클라라는 아시시의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평생 프랜시스를 따랐습니다. 11살 연하였던 클라라 수녀는 프랜시스의 친구이자 누이이자 함께 수도의 길을 걸은 소중한 동반자였습니다. 짐승들, 새들과도 교감하며 대화했다는 청빈의 상징 성 프랜시스, 무소유의 정신으로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을 헌신적으로 섬겼던 그의 수도회는 견고했던 중세의 신분사회를 크게 흔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우리의 6월은 평화를 생각하게 하는 달이자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해 옳은 보훈의 달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메르스로 인해 우리 사회의 평안이 더욱 고갈되었습니다. 나라와 민족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조성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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