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요 13:21-30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나이다.
세상 나라의 가치에 의해 정죄 받고 죽은 자, 하나님 나라의 가치대로 살아야 하나이다.
하오나 그런 자가 어찌하여 다시 세상 일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나이까?
주를 위한 염려와 근심까지라도 말씀 앞에 머무는 한 가지 일보다 못할진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영혼을 보혈로 씻어주사 새 영과 새 마음을 빚어주소서.
마리아처럼 주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 이것만 있으면 족하나이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의 발씻김의 행위는 그의 죽음을 표상한다.
곧 제자들의 죄를 정결하게 하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는 구원의 행위를 상징한다.
그러나 제자들 중 가룟유다는 거기에서 제외된다(11절; 너희가 다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마귀가 이미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넘겨주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2절).
그러나 유다의 배반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 발꿈치를 들었다'는 성경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다의 배반으로 인한 예수의 죽음은 마귀의 뜻이나 그에 따른 유다의 배신을 넘어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예수께서 유다의 배신을 암시하여 말씀하신 후 그 심령이 매우 불안하셨다(21절).
이는 인간 예수 안에 깃들인 인간적인 영, 또는 감정의 자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넘겨줄 것이다"(21절).
제자들은 그것이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 몰라 서로를 바라보았다(22절).
제자중 하나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23절).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머릿짓을 하고 나서 말하였다.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알아보라"(24절).
그 제자가 예수께 기대며 물었다. "주여 누구입니까?"(25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그리고 그 떡 조각을 적셔서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에게 주셨다(26절).
유다가 떡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27절).
그러나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들 중에는 아는 자가 없었다(28절).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자루를 맡았으므로 예수께서 그에게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신 말씀인줄 생각하였다(29절).
유다가 그 떡 조각을 받고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로 말씀하셨다.
이에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편 제자중 하나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예수와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은 당시의 식사관례를 따랐다.
당신의 식사 관례는 주인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기대어 눕는 방식을 취하였다.
식사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은 왼편으로 기대었다.
왼팔로는 몸을 받쳤고 오른 팔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다.
주인을 중심으로 왼편이 주빈석이고 그 오른편이 차석이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왼쪽을 예수의 품에 기대어 누웠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제자이며, 그 자리가 주빈석은 아니었다.
베드로가 그에게 머릿짓을 하면서 '예수를 팔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이로 보건대 베드로는 예수의 좌우편이 아닌 예수와 떨어져 있는 자리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품'은 창세전부터 아들이 아버지와 관계하는 존재방식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창세전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15;10).
아버지는 아들보다 크시며(14:28), 아들은 아버지 품속에 감추어진다(1:18).
곧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된다(17:21-22).
그리고 아들의 생명을 얻은 자가 아들 안에 거하면 아버지 안에 거하여 온전함을 이룬다(14:20; 17:23).
곧 아들의 품속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 품속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아들의 품속에 거한다.
그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된 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복종하듯 아들에게 복종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이는 장차 성령이 오셔서 그를 아들 안에, 아버지 안에 두심을 의미한다(14:20).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의 요청에 따라 예수를 팔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가 예수께 대한 물음은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28-29절 참고).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당시 유월절 식사에서는 쓴나물을 질그릇 항아리에 담긴 양념에 적셔 먹었다.
여기서 쓴나물은 떡으로 대체되고 있다.
유다가 떡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요한복음에서 '사탄'이라는 말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다른 곳에서는 세상 임금(12:12:31; 16:11), 또는 '마귀'라는 말을 사용하였다(6:70; 8:44; 13:2).
세상 임금은 사탄의 다른 이름이며, 마귀는 사탄이 부리는 종이다.
이제 사탄이 유다에게 직접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때는 바로 예수께서 유다에게 떡 조각을 주셨을 때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탄의 활동 역시 하나님 안에 계시는 예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사탄이 활동하지 못하며 그의 허락 안에서 활동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6).
유다는 '떡 조각을 받은 자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최후 경고를 무시하였다.
그가 떡 조각을 받자, 예수께는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고 명하신다.
이 말씀은, 상기한대로 예수가 죽음에 넘겨진 것은 사탄의 의지나 유다의 배신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나아가 예수 스스로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보여준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8).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가 유다에게 한 말을 알지 못하며 나름대로 해석한다.
그가 명절에 쓸 물건을 사러간다거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나갔다. 그리고 때는 밤이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이중적 의미로 쓰인다(3:3, 니고데모의 방문).
역사적으로는 밤 시간을 의미하고 상징적으로는 어둠을 의미한다.
밤은 예수의 일이 끝나는 시간이다(9:4; 11:10; 12:35).
그 때는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어둠에 속한 자는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12:35).
어둠에 속한 자는 창세전 영원에 무지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들이 아버지 품속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로써 그가 아들의 품속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오직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만이 아들의 품속에 거하며 아버지 품속에 거한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빛에 속하며 빛의 아들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의 떡을 받은 유다는 어둠에 속한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 자신의 문제는 야망이었다.
이것은 최근 성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파악한 그의 문제였다.
곧 유다는 예수를 통해 정치적 해방의 야망을 품었으나 그 뜻이 좌절되는 듯 하여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인간의 야망을 지배하여 그를 악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교회 안에 빛과 어둠에 공존한다.
그들은 모두 예수와 함께(?) 있으며 예수로부터 떡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는 빛에 속하며 어떤 이는 어둠에 속한다.
빛에 속한 자는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영원을 안다.
그는 오직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뜻, 영생을 알며 영생을 산다.
반면 어둠에 속한 자는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영원에 무지하다.
그의 인생은 이생에 닻을 내리며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따른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야망을 위해 예수를 팔아넘긴다.
그는 겉으로는 충성된 일꾼으로 보여도 실상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일꾼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4. 나의 묵상
나는 오래도록 어둠에 속한 자였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이 말씀을 들으며 그를 맹렬히 추종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영원에 무지한 자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 닻을 내리고 보란듯하고 성공하고 풍요로운 '3A'의 인생을 꿈꾸었다.
내 안에는 야망이 가득하였다.
세상에서도 그러하였으나 목회를 하면서도 그러하였다.
뭇 사람이 부러워하는 성공하는 목회를 꿈꾸었다.
그것이 무엇이던가?
사람들 모아 교회건물을 보란 듯이 짓고 후에는 교회 정치하는 것이었다.많은 목회자들이 걷고 있고 꿈꾸는 그런 목회를 추구하였다.
이 때 성도들은 철저히 목회자 한 사람을 위한 이용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인데 말이다.
아, 돌아보니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세속의 복을 믿음의 척도로 삼고 세상의 형통을 목양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헌금 많이 하고 목사에게 순종 잘하면 1등신자로 간주하였다.
누구를 위해 조종을 울리는가!
아, 누구를 위해 교회를 다니며, 누구를 위해 목회를 하는가?
나는 심판받고 죽기에만 합당한 목사였다.
그리고 그 심판이 임하고 죽음이 임하였다.
세속 가치로 목회하던 자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자에게 말씀이 임하였다.
그 말씀으로 영생을 얻고 빛의 아들이 되었다.
세상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던 자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상 나라의 가치가 나를 삼키려 든다.
아들의 결혼준비를 하면서 수시로 자괴감을 경험한다.
50대 후반쯤 되었으면 안정되고 잘나가는 목회를 하며 교회 정치판에도 뛰어들 나이이다.
많은 인맥을 과시하며 아들 결혼식도 성대히 치를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교회도 사람도 인맥도 거의 없다.
얼마전 청첩장을 인수했으나 딱히 돌릴 곳도 없고 또 돌리는 것도 주저된다.
세속 가치로 보면 지지리도 못난 아버지이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나도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마땅하다.
세상일보다 더한 눌림이 있다.
이는 주의 일로 인한 근심이고 염려이다.
내가 어둠속에서 추구하던 세속적 목회가 다반사이다.
영생의 진리를 전하는 일은 인기 있는 사역도 아니고 더구나 돌풍을 일으키는 사역도 아니다.
당장 교회 부흥에 도움이 안 되는 사역, 다수가 기피하고 외면한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자기 인생을 얻기 위해 몰두한다.
그래서 주의 일로 근심하고 염려한다.
새벽, 누가복음 10장을 읽는데 주님이 감동을 주신다.
주의 일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이다.
주의 발치 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것, 이 한가지로 족하다는 것이다(눅 10:41-42).
영생을 전하는 일이 주의 일이나 이것으로 근심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날마다 주의 발치 아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는 것, 이것으로 족하다고 하신다.
아들의 품에 거하고 아버지 품에 거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것, 이것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지복이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신 33:3).
5. 묵상 기도
아버지...
오랫동안 어둠에 속한 자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떡을 먹었으나 유다의 길을 가던 자였습니다.
어둠에 속한 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영원에 무지하였습니다.
이생에 닻을 내리고 보란듯하고 성공하고 풍요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내 속에 세상에 대한 야망을 채우고자 목회하는 자였습니다.
속고 속이는 자, 어찌 목사라 하는 이름을 감당하리이까!
아버지여...
제게 임한 심판은 진실로 공의의 심판이었습니다.
심판의 홍수로 내가 이루었던 세속의 성취가 휩쓸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빛이 임하고 눈이 떠졌습니다.
영원의 세계를 알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자 되었나이다.
영생의 부요함은 실로 말할 수 없나이다.
아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다시 나를 사로잡아 갑니다.
세상과 세속목회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 무엇을 더 바라리이까!
세상이 나를 못 박았으니 나 또한 세상을 못 박습니다.
주의 일까지도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구하는 것, 한 가지 주의 말씀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 중에 멸망하지 않은 것은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이 한가지로 족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http://cafe.daum.net/wmmission)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