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을 다음의 방식을 통해 입증하고자 한다: 죽은 것들에 대해 말할 때 어떤 것이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죽은 것(dead)이라고 진술하는데, 성서는 죽은 것들(dead things)에 대해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굳이 문법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죽음'(dead)이라는 말은 실제로 '죽을 운명'(mortal)이라는 말보다 좀더 강한 용어이다. 문법 학자들은 '죽음에 이르는 행위'(mortal work)는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죽은 행위(dead work)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언에 기록된 것처럼 살아있지 않은 것을 경멸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잠 15: 8).
"두 번째로, 의지(will)는 그러한 죽은 행위(dead work)를 사랑하든지 증오하든지 해야만 한다. 의지는 악하기 때문에 죽은 행위(dead work)를 증오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의지는 죽은 행위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은 것들을 사랑한다. 행위 그 자체는 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하는 하나님에 반대하는는 악한 의지의 행위만을 유발할 뿐이다." (LW 31, 47-48)
앞선 논제 9에서 루터는 중세 스콜라 전통,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앙인들이 행한 선한 사역들은 은혜가 없이 행한 행위로 공적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죽은 행실'(dead work)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한 처벌을 받아 '죽이는 행실'(deadly work)은 아니라는 주장에 반박하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기독교 신앙에 매우 위험한 일임을 지적하였다.
중세 스콜라 전통은 소위 '인자한 이방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은 행실'(dead works)과 '죽이는 행실'(deadly works)을 구분하는데, 루터는 논제 10에서 그러한 구분은 실제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호언난어(胡言亂語)와 같다고 주장한다. 어찌 죽은 행위가 생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행위가 아닐 수 있겠는가?
루터가 논제에 대한 부연 설명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성서적으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문법으로도 혼란만 초래할 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죽은"(dead)이라는 말은 "생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deadly)것보다 더욱 악하다. 죽은 행위는 생명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반면에 '죽음에 이르는 행위'(mortal work) 또는 '죽일 행위'(deadly work)는 최소한 죽이기 위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신앙인들이 행한 선한 사역에 대해 좀 더 관대하고자 그들의 행위를 '죽은 행실'(dead work)일 뿐, '죽이는 행실'(deadly work)은 아니라고 규정하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주장은 불신앙인들의 행위가 더 악하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그 자체로 모순에 빠지고 만다.
성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잠언 15장 8절에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라는 말씀하는데, 이 때 악인의 제사는 곧 살아있지 않은 '죽은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분명 그러한 죽은 행위를 경멸하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불신앙인들이 행한 선한 사역에 좀 더 관대하고자 중세 스콜라 신학이 주장하듯이, 그들의 행위가 단지 '죽은 행실'(dead work)이지, '죽이는 행실'(deadly work)은 아니라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경멸하시는 죽은 행실에 대해 좀 더 우호적이게 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루터는 또한 '죽은 행실'(dead works)과 '죽이는 행실'(deadly works)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the will)에 대해서도 혼란만 초래할 뿐임을 지적한다. '죽은 행실'을 향한 의지의 태도는 무엇인가? 인간의 의지는 그러한 '죽은 행실'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그것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증오하는가?
물론 인간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죽은 행실'을 거부하고 증오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고 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중립성을 가질 수도 없다. 따라서 죄인의 의지는 그 자신의 죽은 행실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고, 결국 죄인의 의지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악한 의지의 행위만을 초래할 뿐이다.
루터에게 있어 인간의 의지는 노예 상태이며, 결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그의 존재와 그의 행위의 모든 것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루터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거역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의지에 따라 죄를 범한다: "우리 안에서 정욕이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는 근본 원인이 무의식에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큰 의지와 열망으로 행동한다."(WA 39 I, 378, 16-18.)
루터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혹자는 루터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도덕적, 윤리적 능력을 거부하거나, 이에 대해 너무 편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이 일종의 의(義)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터는 그 의를 '도덕적', '시민적', '외적', 그리고 '공적'인 의라고 불렀다. 이 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도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의'를 요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는 오직 사람들 앞에서만 타당하다. 인간이 도덕적, 시민적 의를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 법정 앞에서 나를 심판하는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설 때 시민적 의는 우리를 도와주지 못한다." (WA 39 I, 378, 16-18.) 다른 곳에서 루터는 "인간 자신의 양심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심판은 그의 양심이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는 한 세상의 심판의 법주에 속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LW 32,274; LW 34, 151.)
여기서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 '시민의 의'라는 의미에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정직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전혀 죄가 없다고 여기거나, 죄의 심각성을 축소시키려는 인간의 경향성에 대한 경계이다. 인간은 이러한 '시민적 의'에도 불구하고 심연에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그 자신만을 신뢰한다.(LW 12, 354) 따라서 루터는 '시민적 의'라는 의미에서 인간이 선을 행한다고 말하기에 앞서, 그들을 죄인, 죽은 자라고 부른다.
지난 세기 세계 교회는 큰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가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된 인간의 모습보다, 심연에 잠재해 있는 '긍정의 힘', '자기 확신', 그리고 이에 기초한 '성공과 번영'의 메시지가 강조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메세지는 개인의 번영과 성공만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 했다는 비판을 낳았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이러한 번영 신앙과 신학에 대한 반성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약자에 대한 돌봄' 등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타종교와 불신자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기독교가 좀 더 관대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웃을 돌보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고 메세지임을 강조한다. 그러는 사이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로 차별받는 동성애자들이 교회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교회가 기득권층과 가진 자들에 대한 사회적 불만과 불신을 토로하는데 지나치게 앞장서고 있다.
인간이 죄성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듯 외면하고, 교회가 개인의 성공과 번영의 메세지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라 자기 확신에 도취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다. 죄의 심각성과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메세지보다 그저 '사회적 책임'과 약자에 대한 돌봄과 사회 정의만을 외치는 것은 교회를 그저 사회적 시민단체나 자선 단체로 만드는 것과 다름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믿는 자나 신앙이 없는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과 힘을 가진 자나 사회적 약자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죄된 인간, 그 모습 그대로 고백하는 것,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으로 가는 길임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