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 민족의 교회를 향한 꿈을 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독일 유학길에 오르면서 경험했던 충격은 독일에 살아있는 교회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한때 살아있는 기독교의 양심이라 일컬음 받았던 독일 교회는 늙어 있었고, 병들어 있었고 생명의 빛이 다해 죽어 있었습니다. 이는 독일 교회뿐만이 아니라 유럽 교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과거의 영화에 대한 아련한 추억만이 텅 빈 예배당에 남아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넘게 유럽교회에 대한 실망과 좌절과 영적 번민 속에 있던 제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황폐함속에서도 남겨두신 그루터기교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황폐함속에서 가지는 복음의 생명력은 대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은혜 속에서 민족 교회에 대한 불타는 열정으로 학위를 마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귀국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받았던 은혜와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목회와 후학 양성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족교회를 살리겠다는 저의 헌신과 열정은 어느새 복음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을 향한 판단과 질책과 정죄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부흥에 대한 열정은 어느새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성도들의 숫자와 그로 인해 교회가 가지는 힘에 대한 자랑의 유혹에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아닌 자기 열심으로 지쳐가고 있던 저는 내 열정과 헌신과 능력으로는 -설혹 복음을 동원한다 해도- 누군가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복음으로 변화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날마다 복음 안에서 변화되는 현재 진행형의 삶입니다. 그 때부터 저는 목회의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의 중심을 내가 변화되는 것에 두고 날마다 세 가지를 확인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누리나?
나는 하늘에서 온 사람(에베소서2:5-7)인데도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영원한 것처럼 살고 있나? 그래서 이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에 얽매여 살지 않나? 성실함과 헌신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나를 하늘의 사람으로 부르신, 그 큰 사랑을 베푸신 아버지의 사랑에 반응하는 사랑의 헌신인가? 비교와 경쟁이 아닌 나눔과 섬김의 삶이 자동적으로 따르고 있나? 더욱이 내가 나를 가치 있는 존재라고 증명하고 내 능력을 자랑하려고 하나? 누가복음 9장 23절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자기부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이루셔서 섬기셨고 겸손하셨고 자기를 조금도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만 드러내심으로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했습니다.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자기를 깨뜨려야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는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질그릇이고 그 안에 보배를 가졌습니다. 이 보배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 이 보배를 내가 가지고 있으니 이 보배가 드러나려면, 아버지의 뜻이 드러나려면 결국은 나라는 사람이 깨뜨려져야 되는 것인데 나는 내 자존심과 내 생각을 깨뜨려 내 안에 있는 보배가 드러나는지? 복음이 주는 자유와 넉넉함으로 예수님이라는 보배만 드러나는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싸움을 쉬지 않으려고 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랑이 동기가 되는 목회를 하는지?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많은 헌신과 수고와 열정을 아끼지 않고 쏟고 난 후에 밀려오는 공허함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너희는 절뚝발이와 썩은 것을 드렸다'고 선언하시는 것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는 것과 같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바벨론포로 동안의 깨달음으로 인해 포로귀환 후에는 율법에 의거해서 최고의 정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절뚝발이와 흠이 있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다른 의도로 드려졌기 때문에, 제사를 세상 것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오히려 '경멸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헌신과 열심으로 내가 기대하는 보상은 무엇인가? 아니면 내 기대만큼의 보상이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감사를 올려드릴 수 있나?
결국 그 큰 사랑을 받은 내가 사랑의 동기로 헌신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박국 3장 18절의 고백처럼 내게 아무것도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합니다. 하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이미 받은 사랑으로 사역하고 있는지의 싸움입니다. 자주 미가서 3:5-6과 겔34:7-10절을 묵상하면서요.
세 번째로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닮는 성장을 하고 있나?
예수의 변화된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은 자라게 됩니다. 내가 변하는 것이 중심인 목회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는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이 뒤집어져 바뀌는 것만을 은혜라 하지 않고 오히려 오늘 하루 내게 주시는 말씀 한 가지에 순종하려는 몸부림,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작은 한 가지 순종은 오늘도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자만하거나 교만할 틈이 없습니다. 다른 동역자가 기준이 되지도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닮는 성장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종으로 날마다 자기부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삶입니다.
내가 내 열정으로 누군가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내가 내 능력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려고 몸부림치면 성공했을 때 자기 자랑과 교만가운데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실패했을 때는 좌절과 낙심 속에서 사명의 자리를 내려놓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 자체가 바로 나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나의변화가 중심인 목회의 결과는 나의 생명이 일어나고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살려줌으로 모두가 진정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큰 사랑으로 하늘나라로부터 보내진 자입니다. 그리고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어가는 자입니다. 그 뜻을 이루어 가는 방법은 주님이 하신 방법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깨뜨려 복음의 자유함을 누리고, 사랑이 동기가 되는 목회로 내 생각은 십자가에 죽이고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순종의 삶으로 보내신 자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이 싸움을 이 세상 다 하기까지 하고 싶을 뿐입니다.
/한복협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