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묵상] 죽지 않고 살 수 있는가? 반드시 죽어야 생명을 얻는다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1. 오늘의 말씀 : 요 11:17-3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생명의 말씀이 역사하지 않는 현실을 보며 영이 요동하고 고통 하는 자 됩니다.
말씀은 오직 성령의 역사할 때 생명이 되는 것이오나 그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말씀은 무익합니다.
소외가 깊어지고 낙담과 절망이 일상의 불청객이 되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떠는 자 되는 것은 나의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기 위함입니다.
육에 속한 인생들에게 어리석어보일뿐인 영생의 말씀, 어찌 내가 감당하리요?
나의 죄악을 보혈로 씻어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먼저 말씀 앞에 떠는 자 되게 하소서.
말씀 앞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먼저 경험하게 하소서.
아들의 보혈은 제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이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그도 땅에서 들리기 위함이다.
그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그리로 이끌어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죽으러' 가시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표적을 통해 예시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로처럼 죽으신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 자신에게도 영광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8).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다(17절).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15스다디온(3km) 정도 되는 거리이다((18절).
많은 유대인들이 그 오라비의 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려고 와 있었다(19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20절).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다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이라도 주님이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압니다(21-22절).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비가 살아날 것이다"(23절).
마르다가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압니다"(24절).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25-26절).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가 믿습니다"(27절).

이렇게 말한 후에 마르다는 가서 자기 자매 마리아를 불러 은밀히 말하였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28절).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께 왔다(29절).
예수께서 아직 동네에 들어가시지 않고 마르다가 마중 나왔던 곳에 아직 계셨다(30절).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해주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울려고 무덤으로 가는 줄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다(31절).

마리아는 예수가 계신 곳에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32절).
예수께서 마리아도 울고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영이 동요하며 고통스러워하였다(33절).
그리고 "그를 어디 두었느냐?" 물으셨다.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34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35절).

그래서 유대인들이 말하였다. "보라,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했었는가?"(36절).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절).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은 베다니에 오기전 머물렀던 곳은 요단강 건너편 요한이 세례 주던 곳이다.
그곳은 뵈뢰아 동편 지방에 있으며 그곳 이름도 베다니이다(1:18).
두 장소의 거리는 하룻길 정도 걸린다.
그리고 이틀을 더 거기에서 머무셨다.
그가 나사로의 동네에 왔을 때 그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다.
이로 보건대 예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모두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행동파인 마르다가 먼저 가서 그를 맞았다.
그러면서 말하였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만일 예수께서 계셨더라면 그의 병을 치료해주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예수를 단순한 치유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예수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첨언한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라비가 죽은 것으로 인한 극한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소망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오라비가 다시 사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부활을 고지한다. "네 오라비가 살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마지막 날 다시 살줄을 안다고 대답한다.
마지막 날 부활을 믿는 신앙은 바리새파 유대교의 확고한 요소이다(행 23:8 참고).
그래서 여기 마르다의 신앙진술은 전통적인 바리새파의 교리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는 이다'(헬, 에고 에이마)라는 신적 계시용어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면서 마르다에게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신다.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수, 생명의 떡, 생명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밝히 계시하신다.
그가 부활이요 생명인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먼저는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이는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오는 세대에 누리는 생명을 뜻한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또한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은 부활과 생명에 대한 종말이 선취되는 사건이다. 이 부활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5:25).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된 자는 그의 부활에 연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이다(롬 6:4-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가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4-5).

아들을 믿는 자는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는다(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5).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26절).
그러므로 영생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 실재이다.

이에 마르다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
그녀의 믿음은 곧 일어날 일인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오리라는 믿음이 아니다.
물론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믿음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생명을 얻게 하는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진실로 참되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인 고백으로 간주되고 있다.
비록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으나 성령이 오시기까지 그의 고백은 실재되지 않는다.

한편 예수께서는 동네에 그대로 계시면서 마리아를 부른다.
집안에 있던 마리아가 급히 나가 예수를 맞이하는데, 그녀 역시 마르다와 똑같이 말한다.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울고 그녀를 따라온 유대인들도 운다.

예수께서 이를 보시고 '영이 요동치며'(he was deeply moved in spirit), 고통스러워하셨다(troubled).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죽음의 세력을 보시고 격동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영이 요동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견딜 수 없는 상태'이다(스 1:1 참고).
그의 영이 요동치는 것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죽음의 세력에 대한 격분이며 항거이다(히 2:15).
하여 죽음의 세력을 사로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즉시 행동을 개시하신다(히 2:14).
나사로를 어느 무덤에 두었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이 무덤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셨다.
그의 눈물은 오라비를 잃은 누이들의 슬픔이나 그들을 위로한 유대인들의 눈물과 다르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사망의 세력에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인간에 대한 긍휼의 눈물이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사람들은 예수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사로를 사랑해서 운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눈물을 마르다나 마리아, 그리고 자신들처럼 인간적인 슬픔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다.
이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진실이 아니다.
이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사람들의 눈물은 나사로가 부활한다는 가능성을 전혀 알지 못한 것으로 인해 흘린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도 고치신 그가 어찌 나사로를 고치지 못했는가 하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다 알고 계셨다.
나사로의 병듦과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아들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아셨다(4절).
나사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이는 아들 자신의 사건을 예시한다.
곧 아들과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죽은 자, 곧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아래에서 난 인생, 모든 사람은 죄가운데 살다가 사망으로 끝난다.
그러나 아들을 믿어 영생 얻은 자는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영생의 삶은 현재에서 하나님과 사귐으로 시작되며 죽은 후에 완성되는 것이다.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만나 동일하게 말한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습니다"
유대인들도 나사로가 죽은 것에 대해 예수를 탓한다.
맹인을 낫게 한 자라면 그가 사랑하는 자의 병을 낫게 해주지 않았을 것인가!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사람들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의 세력 앞에서 슬퍼하고 절망한다.
그들에게 죽음 너머의 소망은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를 보시고 영이 격동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
그의 격동하심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가는 죽음의 세력에 대한 것이며, 그의 안타까움은 죽음의 세력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사람들의 해법은 자명하다.
그것은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죄 가운데 살다가 죽어 마땅한 인생, 그런데 죽지 않고 사는 길을 구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최대의 슬픔과 절망은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희망과 꿈, 그의 성취, 사랑하는 가족과의 관계를 단번에 몰수한다.
나무는 희망이 있어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않는다(욥 14:7).
그런데 인생은 그가 장정이라고 죽으면 소멸되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욥 14:10).
일개 미물인 나무의 생명만도 못한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고 연기하고자 한다.
임박한 미래에 몰두하며 마지막 미래인 죽음은 애써 외면한다.
낙엽이 지듯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퍼하고 탄식하고 절망한다.
당사자에게 죽음이 선고되면 대체적으로 부인하고(아니야!) 분노하고(왜 내게!) 타협하고(살려주면!) 그러다 수용한다고 한다.

어디 육체적 죽음뿐인가!
정신적 죽음도 감당하지 못해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정신적 죽음은 소외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떠나 존재적으로 소외상태인 인간은 누군가 혹은 무엇인과의 일체시키려는 욕망에 시달린다.
아기는 탯줄이 끊어지면서 엄마와 분리되나 엄마와의 일체감으로 존재적 소외감을 견딘다.
그러다가 친구, 이성, 돈, 명예, 지위 등으로 일체감을 느끼는 대상이 발전한다.
나아가 인터넷, 술, 담배, 마약, 동물 등 비인격적인 대상을 통해 일체감을 느끼려고 한다.
사람에게 실망한 자는 애완견을 친구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치명적인 대상은 종교 생활에 있다.
오늘날 교회의 집단화 대형화 현상은 존재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피난처가 된다.
'아무 교회 다닌다' '직분이 뭐다' '이런 봉사를 한다'라는 식으로 소외감을 극복하려든다.
하나님(존재)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들(존재물)에서 안식하려 한다.
생명의 삶, 하나님과 사귐에 착념하는 진실한 신앙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후의 소외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곧 자기도 자기를 용납하지 못한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나오는 '모르쇠'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방인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원죄라고 정의하였다.
'원죄는 남들이 잘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가장 문제가 되는 상태이다.

육체적 죽음이나 정신적 죽음의 근원은 영적 죽음이다.
그래서 육체적 죽음, 정신적 죽음 자체를 피하고 극복하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그들은 실상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들의 종노릇을 하며 그 세력에 끌려 다닌다.

궁극적인 해법은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길뿐이다.
이는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옛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실재된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어야 하고,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파우스트의 그레트헨처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이다(네가 구원받았으니라!).
무한한 자기체념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죽음의 세력을 멸하러 오신 주님은 오늘도 격동하신다.
그것은 이미 멸망 받았으나 사람들을 속이며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망의 세력에 분개하신다.
또한 그는 이미 멸망 받았으나 그것을 모르고 사망의 세력에 종노릇하는 이들로 인해 탄식하신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눈물 흘리신다.
그리고 즉시로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신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4. 나의 묵상
나는 50여 평생 죽음의 세력에 종노릇하며 살았다.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죽음의 세력에 끌려 다닌 자였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존재적으로 소외된 자에게 교회는 피난처가 되었다.
수천 명이 모인 교회에서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고 봉사하니 살맛이 났다.

그러다 신대원을 가고 목사까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영적으로 죽은 자로 살았다.
하나님이 주신 존재물을 방패로 삼아 정신적 죽음의 상태를 모면하였다.
여러 가지 영적 존재물들은 비참한 존재를 가리는 무화과 잎이었다.
갈수록 기만적 종교생활이 깊어졌다.

입술로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고백했으나 생명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몰랐던가? 구원, 영생, 복음, 진리... 다 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마르다가 입술로 고백한 명목상의 신앙, 피상적인 신앙, 그 뿐이었다.
영생의 실제를 몰랐으니 모든 것이 뒤틀렸다.

그러던 자에게 죽음이 왔다.
시편 88편에 나오는 정신적 죽음의 상태가 내게 임하였다.
나는 죽은 자 중에 던져졌고 무덤에 누운 자가 되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들을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다.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멀리 떠나고 흑암만이 나의 절친이 되었다.
갇혀서 나갈 수 없는 자, 그런데 그에게 그레트헨과 같은 구원이 임했다.

심판하시는 말씀 앞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주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그 때로부터 알 수 없는 평화가 임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심판으로 의를 세운 결과 오는 평화였다(시 94:15; 사 32:17).

그런데 죽음의 세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가혹할 정도로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나 듣는 자가 희소하다.
그러 인해 다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현실 앞에 낙담한다. 감당하기 버겁다.

이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는 목사님들도 고통을 당한다.
영생은 하나님의 뜻이나 이 시대 신자들은 원치 않는다.
다만 죽지 않고 사는 길, 망하지 않고 일어나는 길만을 따른다.
마르다처럼 진리를 다 고백하면서 말이다.
죽어야 생명을 얻는다. 망해야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영생의 문이다.

새벽부터 엎드려 긍휼을 구한다.
지독한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사망의 세력을 바라본다.
그리고 부르짖는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구원의 행동은 즉시 개시된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건지신다.
그는 오늘도 내게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그 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낸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영적으로 죽은 자였으나 알지 못한 자였습니다.
존재적 소외감에 시달리며 50여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와 일체감을 느끼려 하며 허랑방탕했습니다.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는 것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수많은 존재물을 도피처로 하여 숨는 자 되었습니다.
그것들을 통해 안식을 얻으려했던 자였습니다.

아버지여...
죽음의 세력에 종노릇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죽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 치던 자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하는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구원의 자리였나이다.
나사로의 죽음, 나의 죽음은 생명 얻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어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이 실재되었나이다.

아버지...
그러나 오늘도 구원을 호소합니다.
사망의 세력으로 인해 지독한 소외감을 느낍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으며 나 자신도 이방인처럼 느껴집니다.
응답하지 않는 시대, 과연 생명의 복음을 계속 전해야 하는지 회의가 듭니다.
아, 사망의 세력 앞에 격동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거기 끌려가는 나를 향한 주님의 긍휼을 봅니다.
속히 구원하소서. 속히 일어나소서. '네가 어디 있느냐?'
아들을 힘입어 당신의 품에 들어갑니다. 그곳만이 제가 있을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http://cafe.daum.net/wmmission)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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