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이 독자로 삼은 유대인들이 족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다윗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마태는 족보로 시작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책을 읽으며 친밀하게 예수 그리스도을 영접하기를 의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는 것은 독자를 위한 배려요, 접근을 위한 지혜입니다.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법이며 관계 증진을 위해 좋은 방법입니다. 이런 지혜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어야 합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했던 그 메시야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2장 이하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삼하 7장 12절 이하에서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나 다윗에게 약속하신 네 몸에서 날 자식은 단순히 이삭이나 솔로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창, 삼하 7:12).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약속은 이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제 마태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과 다윗 왕국의 백성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그것을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마 3:8,9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아울러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롬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정치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다윗 왕국의 회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약속한 영원한 다윗 왕국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진정한 다윗 왕국의 기쁨을 느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조차 주님이 정치적인 다윗 왕국을 회복하실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이 세상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죄 없는 의인의 명단이 아닙니다. 평범한 죄인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살던 평범한 사람,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택하시어 새로운 순례의 길을 가게 하셨고 구속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음의 조상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약한 자입니다. 그의 성숙은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습니다.
6절의 다윗을 봅시다. 다윗도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그냥 솔로몬을 낳았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남의 아내를 통해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굳이 밝힐까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인 다윗조차도 죄인이고 그러므로 인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존재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런 죄인이 존귀한 이름을 갖게되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삼하 7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후 범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와 맺은 언약이 파기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합니다. 사람이 문제지. 마태는 다윗을 영웅시하는 유대인들에게 다윗조차도 추악한 죄인임을 밝히며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사람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3절의 유다를 보십시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이 누구입니까? 며느리 아닙니까? 유다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유다 지파의 조상입니다.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유다 조차도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냥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하면 될텐데 마가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대표격인 유다의 추한 과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로서는 이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마가는 분명하게 밝힙니다. 누구도 의로울 수 없다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영적으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영원한 다윗 왕국의 진정한 백성이 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 왕국의 백성이 되는 은혜를 입었으나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불러 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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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마 1:18~25)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리아와 요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묵상합시다.
◆마리아 =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세상에 가장 복 받은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마리아는 한 평범한 여인입니다. 그는 누가복음 기록에 의하면 나사렛이라는 한 촌동네 여인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그런 마을입니다. 그러나 그런 촌 동네의 한 이름 없는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마리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18절,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절, "성령으로 된 것이라" 성령이 역사하시니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소녀였습니다.
마리아로서는 이 놀라운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받아 자기 몸을 기꺼이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몸을 주님 나라 위해 사용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의 몸도 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드립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합시다. 이렇게 마리아가 구별되게 쓰여졌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를 성모 마리아로 추앙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은혜를 입은 것일 뿐 그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기도를 하거나 그가 주님과 같은 중보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해 나의 목소리건 돈이건 건강이건 쓰여지는 것은 은혜이지 그것으로 인하여 내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요셉 =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기사에서 마리아보다는 요셉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마리아만 부각됩니다. 그것은 누가의 강조점입니다. 여성, 죄인, 이방인 등을 부각시키고 있는 사람이 누가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유대인들을 향하는 책이기에 다윗의 후손(20절)인 요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 의로운 사람 요셉
19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의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의로운 행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로운 삶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미 마태복음 서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는 삶을 강조합니다. 열매를 말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1장에 등장하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도 의로운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인다운 의로움을 가지고 삽시다.
2. 남의 허물을 조용히 해결
19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의 의로움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 잉태했을 때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확실하게 드러난 다른 사람의 죄라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요셉의 태도는 매우 귀합니다. 충분히 마리아의 불순한 행동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조용히 처리합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은 자기의 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는 돌로 쳐죽일 죄이지만 요셉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이런 의로운 행위를 보며 우리들이 주의합시다. 말하기 전에 침묵하십시오.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일이라면 서두릅시다. 그러나 허물을 지적하고 문제를 들춰내야 하는 일이라면 우선 입을 다뭅시다. 그리고 요셉과 같은 태도를 배웁시다.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일부러 찾고 전파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닙니다.
3. 많은 생각, 신중한 결정
20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요셉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부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생각을 한 후 행동을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정황이 분명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합시다. 좋은 일은 빨리 행동합시다. 그러나 분명하지 않을 때는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20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요셉은 많은 생각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 때 꿈에서 주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적당한 때에 나타나서 인도하십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끊기로 생각하였을 때, 하나님은 요셉을 인도하셨습니다. 많이 생각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함부로 결정하고 판단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결정하고 행동합시다. 추측하고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버립시다.
4. 참된 의로움 - 순종
24절,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의로운 삶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주의 사자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25절에서 이름을 예수라 한 것도 순종의 결과입니다. 2장 22절에서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가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 오게된 이유도 주의 사자의 분부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심사숙고하였습니다. 그는 행동을 보류한 채 침묵하며 오래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행동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의 의는 이렇게 행동으로 입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