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묵상] 아브라함이 있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현존'의 삶을 주시다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1. 오늘의 말씀 : 요 8:48-59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오늘도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자 되옵니다.
육신의 생각은 심히 교활하여 분노에 대한 정당성과 합리성, 논리성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주장하여 결국 환난과 곤고의 무덤으로 던져버립니다.
주여, 영의 생각으로 육신의 생각을 멸하게 하시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 되게 하소서.
아들의 죽음에 빚진 자 되었은즉 어찌 육신대로 살아 사망에 이르리이까?
영의 생각을 따라 행하여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보혈로 씻어주사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소서.
나의 안식, 아들을 힘입어 들어가는 당신의 품이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이 계속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부하나 아브라함이 증거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이려한다.
그들은 급기야 자기들의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뿐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의 아버지 마귀에게 속했다고 규정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거칠게 예수를 비난한다.
그가 사마리아 사람 또는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다(48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신다.
"내가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공경하고 있는데 너희가 나를 멸시하고 있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그 영광을 구하시며 심판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49-51절).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이제 우리는 네가 귀신들린 것을 분명히 알았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너는 '만일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하니 당신은 이미 죽은 아브라함보다 크다는 말이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52-53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은 헛되다. 나를 영광되게 하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다. 곧 너희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시다. 너희는 그 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을 안다. 내가 그 분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54-56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말하였다.
"당신이 아직 50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절).
그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몸을 피하여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59절).

예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나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자신이 진리이자 진리로 사람들을 자유케 한다.
그것은 죄로부터 자유이며, 죽음으로부터 자유이다.
그의 말에 거하면 죄의 종에서 해방되며(34절), 영원히 죽지 않는다(51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말에 반박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행위는 사악하여 그들의 주장은 허구로 드러난다.
그들은 진리가 그 속에 없는 거짓의 아버지 마귀에게 속한 자일뿐이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크게 반발하여 예수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 또는 귀신들린 자라고 한 자신들의 말이 옳다고 결론 내린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자 또는 변절한 족속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 가지로 비난했으나(사마리아 사람, 귀신들린 자), 예수께서는 한 가지 비난(귀신들린 자)에 대해서만 대답하신다.

이는 사마리아인과 귀신들린 자가 서로 병행됨을 뜻한다.
그 당시 도시데우스와 시몬 마그우스는 사마리아인들로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귀신들린 자로 취급받았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일관되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높이고 있는데 그들이 그를 멸시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스스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가 자신의 뜻에 복종하는 아들에게 영광을 주신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12:28).

또 아들에게 영광을 주시는 아버지가 친히 심판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죽음의 잔을 받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그와 동시에 세상 임금(마귀)과 그에 속한 자를 심판하신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그러나 진실로 말하거니와 아들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51절).
아들의 말을 지키는 것은 아들의 말에 거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다.
이렇게 영생을 얻은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며 마지막 날에 사는 자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8:31).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17: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40).

그러나 유대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깨닫지 못한다.
어떻게 사람이 죽음을 맛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조상 아브라함도 죽고 선지자들로 죽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예수가 미쳤다(귀신들렸다)고 판정 내린다.
그리고 다시 예수께 묻는다. "네가 대체 누구냐?"고!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여전히 자기를 증거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에게 영광 돌리시는 이는 아버지이시다.
그 아버지는 그들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이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사상에 근거해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바로 아들이 아버지로 부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나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참 하나님은 만물 위, 하늘, 영원에서 오신 아들의 증거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3:31-33).

만일 아들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면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명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킨다.
이로써 아들의 정체성은 아버지께 복종하는 것에 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또한 예수께서는 '네가 아브라함보다 크냐?'(53절)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아브라함은 '나의 날'(때)을 보기를 매우 기뻐했으며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
유대전통의 창세기 대(大)미드라쉬에 보면 랍비 아키바는 아브라함에게 오는 세대가 계시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시는 '메시아의 날'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24장 1절 말씀을 직역하여 '그의 날들에게로 들어갔고'에서 유추되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창 24:1).
"Abraham was now old and well advanced in years"(NIV). - "그의 날들에게로 들어갔고"
'날들'(복수형)은 보통 유대적 표현이나 신약시대에서는 인자의 '날'로 표현되어 있다(눅 17:22).

한편 유대문헌인 '레위의 유훈서'에서는 아브라함이 보았던 때를 예표하고 있다.
"그 때에(새로 오실 제사장의 날들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매우 기뻐할 것이다"(18:14).
요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에게서 잠정적으로 완성된 구원이 예수에게서 실제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다시 예수의 말을 반박한다.
예수가 나이 50세도 안되었는데, 어떻게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50이라는 숫자는 예수의 젊은 나이와 아브라함과의 대단한 시간 격차의 대조를 지적한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답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느니라'(before Abraham was born, I am).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을 단서로 다시 자신의 기원을 밝히신다.
그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I was)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가 모든 인간의 출생 이전, 곧 영원부터 존재하심을 언표한다.
여기서 '영원'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를 넘어선 궁극적 시점으로서 창세전 하나님의 시간이다.
이 영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영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 곧 피조세계를 초월하는 시간이다.
피조세계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 크로노스이다.
기독교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영원에 대해 증거한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영원에서 왔고 영원으로 돌아가신다.
물론 그와 연합된 자 역시 영원에서 시작되고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창세전 영원에서 택함 받았으며, 창세전 영원부터 현존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구원의 사건은 피조세계, 곧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누리는 완전함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아담의 무죄한 상태로 돌아가거나 피조된 에덴으로의 복귀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였던 영원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영원을 현재로 누린다.

영원을 현재로 누리는 것은 현존을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영원을 상실한 인간의 현존은 과거의 지배를 받으며 미래의 불안에 삼키어진다.
현재를 현재로 누리지 못하며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붙들려 있거나 미래로 도망친다.
그러므로 영원이 부재한 현존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에 잇대어 있는 현존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분리하며 미래로부터 자유케한다.
그 때 진정한 안식이 임한다. 이것이 영원의 실재이다.

'영원의 차원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에 안식을 얻을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히 4:7-11). 그들은 과거에 붙들려 있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지 못한다. 혹은 그들은 현재에 안식할 수 없기에 미래로 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우리에게 현재의 축복을 제공하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특히 서구사회, 그중에서도 이 나라(미국)에 나타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우리 시대는 영원의 차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존'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상실하고 있다'(폴 틸리히, 영원한 지금).

영원에서 오신 아들과 땅에서 난 유대인들의 대화는 결렬되었다.
예수께서는 알아듣지 못한 이들에게 죽기를 불사하고 증거하신다.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말씀, 영생의 진리를 그대로 증거하신다.

아들의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졌으며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을 묻지만 막상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의 순간을 먼 미래로 옮기워버린다.
막상 죽을 때까지도 자기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허상 속에서 살아간다.

아브라함, 선지자들, 그들을 다 죽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아브라함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지 않고 더 나은 본향, 하늘 본향을 사모하며 그리로 들어갔다(히 11:16).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 22:32).
그 아브라함은 영원의 시간에서 아들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것이 영원을 아는 자가 누리는 영원한 복락이다.

4. 나의 묵상
나는 영원에 무지한 자로 신앙하고 목회하였다.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떨쳐낼 수 없었고 무시로 미래로 도망하는 자였다.
영원의 차원을 알지 못하니 무엇을 하여도 안식이 없었다.
결국 한시적인 인생에 매달렸고,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들을 통해 일시적인 안식을 얻고자 하였다.
50여 평생 안식을 원하나 안식 없는 놋 땅에서 허비하였다.

그런 내게 영원의 시간이 들어왔다.
심판의 자리, 아들의 죽음과 무덤에 연합되어 영원한 생명이 실재되었다.
영생은 영원의 하나님과 거기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
그 사귐은 나의 시간을 영원으로 잇대어지게 한다.
영원이 현재로 틈입하여 현존을 살게 한다.
'내가 있느니라'(I am)는 아들 안에서 현존의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한 영원을 사모한다.
이는 육신의 한계로 인함이며, 죽을 몸의 실존으로 인함이다.
과거의 상흔과 미래의 불안이 나를 삼키려 한다.
이내 안식을 잃고 시간 죽이기를 하며 방탕한다.

아침, 문득 17세기에 살았던 로렌스 형제가 기억났다.
그는 보란 듯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설거지나 구두수선을 하면서 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보란 듯한 일을 해야만 안식을 얻으려는 비참한 나를 발견한다.
사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로렌스 형제는 진실로 '현존'을 사는 자였다.
그의 기도문이 나의 기도문이 되기를 간구한다.

'하나님, 당신은 언제나 제 가까이 계십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오직 당신께 바치는 순종이기를 원합니다.
제가 그리하고자 할 때에 당신의 임재를 은총으로 내려주십시오.
이를 이루기 위하여 제가 하는 일들을 도와주시고 그 일의 열매를 당신께 바치오니 받아주소서.
언제 어디서나 저의 사랑을 당신께로 향하게 하여 주소서'

5. 묵상 기도
아버지...
영원에 무지한 채 이생의 시간에 갇힌 자였습니다.
안식 없는 놋 땅에서 안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언젠가 없어지고 사라질 것을 통해 일시적인 안식을 구하던 자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말씀은 깨닫지 못한 채 시비하고 논쟁하던 자였습니다.
영원의 부재 속에서 과거에 매이고 미래로 도망하던 자였습니다.

아버지여...
심판의 자리는 참으로 축복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무덤에 연합되어 영생이 실재되었나이다.
비로소 영원의 세계가 열리고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아는 자 되었나이다.
과거가 내게서 분리되어 진정한 현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미래로 도망하지 않으며 영원에 잇대은 현재를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다시 광야를 사모합니다. 영원한 현재를 풍성히 누리던 그 때를 사모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경주합니다.
다시 무엇을 해야만 안식을 얻고자 하는 나를 고발합니다.
이는 진정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의 내가 아니옵니다.
아들의 복종이 나의 복종이 되어 아버지 품에 거하게 하소서.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현존을 누리게 하소서. 당신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http://cafe.daum.net/wmmission)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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