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복음이 무엇인가요?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김병삼 목사의 고린도전서 강해(4)ㅣ고린도전서 2:1~9
▲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실패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고, 자신의 판단을 의지했다가 낭패를 경험한 사도 바울이 이제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내가 약삭빠르게, 지혜롭게 판단했다고 하지만 얼마나 불완전한 일들인가요?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서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입니다.

흥부와 놀부가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흥부, 놀부는 듣거라. 지금 너희 앞에 똥통과 꿀통이 있느니라. 각각 어느 통에 들어가겠는고?"

그러자 놀부는 잽싸게 먼저 말합니다. "저는 꿀통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는 수 없이 염라대왕은 놀부가 꿀통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흥부는 어쩔 수 없이 똥통에 들어갔다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염라대왕이 명령합니다. "두 형제는 서로 마주 서거라. 그리고 상대의 몸을 핥아 주어라!"

그리고 얼마 후, 흥부와 놀부의 아내도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놀부는 아내에게 재빨리 눈짓을 합니다. (똥통에 들어가라고 말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약삭빠른 놀부의 아내가 똥통에 들어가겠다고 자원했고, 반대로 흥부의 아내는 꿀통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놀부가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염라대왕이 명령합니다.

"지금부터 흥부와 놀부는 각자 아내 앞에 서거라! 그리고 아내의 몸을 깨끗이 핥아라!"

놀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지혜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리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약함을 내려놓았을 때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로잔 국제회의 의장에 오른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하버드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헌신했습니다.

그는 최연소로 동양인으로 처음 1974년 빌리그래험 목사님과 존 스토트 목사님이 시작한 로잔 국제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가 쓴 책이 "I am nothing"이라는 책입니다. 그의 책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일본에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명언이 있다. 이는 윌리엄 클라크의 명언이다. 1800년대 후반에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 농과대학 학장을 지낸 그는 일본 삿포로 농학교의 초빙으로 약 8개월 동안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기간에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 대부분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 요즘에도 일본 음식점에 가면 그 글귀가 가끔 보인다. 그러나 그 명언은 원래의 온전한 형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일본에서의 임기를 끝마치고 퇴임 연설을 했을 때 자신의 학생들을 바라보며 원래 했던 말은 "소년이녀, 그리스도를 위해 야망을 가져라!"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되지 않는 우리의 지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비전과 사역의 방향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될 때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 복음 앞에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상처이자 배움은 '자신이 생각했던 강함이 여지없이 무너졌던 기억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자기 확신이 무척 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핍박하고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적어도 그가 배우고 살아왔던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 믿는 자들은 잡아 죽어야 할 만큼 잘못된 공동체였던 것이죠.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그가 자랑하던 베냐민 지파,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적인 전통, 그리고 당대의 가장 큰 신분 보장인 로마의 시민권까지 말입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는 본성적인 열정으로 말미암아 사역에 대한 기대감이 컸을 것입니다. 목숨을 내걸고 자기가 가진 확신을 전하기 시작하죠. 특히 그는 율법에 능통할 뿐 아니라 당시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헬라 철학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논쟁과 언변으로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고린도에 이르기 전 그리스 아테네에서 철학과 논쟁으로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다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아덴이 헬라 철학의 중심지요, 자신이 배웠던 것이 수사학과 철학, 그리고 웅변이었기에 어쩌면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아덴이라고 생각하고,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아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인도에는 2억이 넘는 신이 있고, 일본에는 8백만이 넘는 신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렇게 신이 많은 민족일수록 두려움이 많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빼놓은 신이 없으면 어떡하나?' '그 신이 진노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아덴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 혹시 그들이 빼놓은 신이 있을까 봐 두려움으로 그 신을 섬긴 것이지요.

그러자 사도 바울은 그것을 호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철학적 지식으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을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궤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꾀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설명을 해 줘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도했으나 철저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열매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생각하는 방법이 철저하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 사람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바로 그런 실패를 경험하고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의 상태가 본문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이런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에 사도 바울은 전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먹고 살기는 해야겠고, 복음도 전해야겠고 해서 가진 직업이 천막을 깁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업으로 삼고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약함 가운데서 복음을 전한 곳,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 떨림을 경험했던 곳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시작이었고, 그의 실패와 떨림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깨닫고 결심하게 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오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사도행전 18장 9~10절까지의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 해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의 사역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선교했다는 것이 결코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혹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도 직업을 가지고 사역을 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의 예를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하는 바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는 사역자를 통해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 그가 떨림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신하지 못하므로 인해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 사도 바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 그 가운데서 밤에 환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그가 새롭게 결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떨고, 실패를 경험한 것이 세상의 지혜, 아름다운 말로 전하려 한 까닭이구나!'

그의 결심이 무엇입니까? 이제 십자가 이외는 어떤 것도 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능력만을 전하겠다는 것이지요. 그제야 비로소 사도 바울은 복음의 '단순성'을 깨닫습니다. 복음은 아름답게 포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이 바로 사도 바울의 결심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이제 십자가만을 전하고 십자가만을 의지하기로 '작정'합니다.

'make a decision'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만을 섬기기로 첫 번째 결심한 이후, 이제는 온전히 맡기고 사역하기로 두 번째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결심에서 두 번째 결심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가 사역자로서 헌신하는 성숙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섬기기로 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방법과 지혜로 무엇을 해보려고 했던 마음을 이제 온전히 주님께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오늘도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있는가?"

어떤 젊은 목사님이 나이가 많은 소위 성공적인 목회를 한 목사님에게 가서 물었답니다.

"목사님 저 설교를 잘하고 싶은데 설교가 잘 안됩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그 목사님이 젊은 목사님에게 되묻습니다.

"혹시 자네는 설교할 때마다 교인들에게 '설교 잘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가?"

"그럼요."

"그러면 틀렸네"

그러자 젊은 목사님을 진지하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원할까?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은혜를 끼칠까를 생각해야지 설교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는 순간 이미 자네는 죽을 쓰는 것이네."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실패한 원인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복음이 능력입니다.

지금 제가 이곳에서 선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자로서 살아야 하는 것은 어떤 모양입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발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 이발사가 말이 많습니다. 세상 이야기, 정치 이야기, 경제 이야기 계속해서 떠드는데 그 손님은 듣기 싫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발사가 손님에게 묻습니다.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잘못됐지요, 선생님?"

그러자 손님은 이야기합니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별로 정신 차려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발사가 화를 냅니다.

"아니 말을 듣지 않으려면 왜 여기에 앉아 있습니까?'

한번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손님이 머리를 자르러 왔을까요? 이발사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을까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이 들려지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 본질적인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어떤 강단의 설교도 십자가의 복음 이외의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깨닫게 된 복음의 진리요 결심의 내용입니다.

■ 구별된 지혜
이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능력과 세상의 지혜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가요? 이 시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신봉하는 진리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관원들, 즉 권력을 잡은 자들이 옳다고 믿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온전한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지혜와"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다를까?

저에게 다가온 깨달음은 세상의 지혜란 내가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를 생각하는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사실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나요?

여러분을 견딜 수 없게 만든 일은 거의 모든 부분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나의 모습이 아니었나요? 어쩌면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완벽하게 보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이 부모님들에게 좋은 자녀가 되려고 노력했고, 모범생이 돼 보았지만 행복하던가요?

지금 여러분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견디기 힘든 부분이 바로 윗사람들과 아랫사람 그리고 동료들의 평가가 아니었나요?

우리가 참 열심히 살아왔지만, 어느 날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 스스로가 아니었던" 그런 모습 때문이 아닌가요?

내가 정말 가정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것이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 엄마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인내가 우리를 허무하게 만들지는 않았나요?

이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었나요?

이러한 잘못된 지혜는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브래던 매닝이 쓴 [아바의 자녀]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성향을 '거짓 자아'라고 표현합니다. 사역자로서 그가 가졌던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었고,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면서 그의 거짓된 모습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쓰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나는 사역 행위를 통해 내 참 자아로부터 숨었다 나는 설교와 집필과 강연을 통해 하나의 정체를 만들어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나를 좋게만 생각해 주면 내 문제는 다 없어지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사역의 성공에 투자하면 할수록 내 거짓 자아는 더 진짜가 됐다."

결국, 세상의 지혜, 거짓된 지혜란,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지금 나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판단과 나의 외적인 모습과 성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지혜로 무장된 거짓 자아는 어떻게 해서든지 눈에 띄려고 합니다. 칭찬받고 싶은 욕망에 부질없이 육체적 만족을 찾아다닙니다. 외모가 자신을 나타내는 모든 것이 됩니다.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이냐 보다는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졌느냐,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가치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꾸 세상의 가치가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실패했던 경험 중의 하나가 헬라 철학의 중심이었던 아덴에서 멋지게 보이려던 그의 철학적 사변이었습니다. 철학적인 곳에서 철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목회자인 저에게도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곳에서 설교하느냐에 따라 고민하게 되지요. 대학에서, 혹은 병원에서, 아니 더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이 배운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멋지게 복음을 포장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화려한 포장에 있는 것이 아니요, 듣는 사람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단순성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가 선포해야 하는 가장 위대한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놀라운 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위대한 능력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14~17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거짓된 모습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바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이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세상의 지혜자, 곧 하나님의 자녀 됨보다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로 무장했던 바리새인들이 용납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이 무엇인가요?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며, 또한 아바의 이름으로 용납했던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병든 자, 절름발이,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들을 돌봐 준 것, 그리고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과 친구가 된 부분도, 결정적으로 도덕적 패배자들, 뻔히 신앙심도 없고 부도덕한 자들과도 어울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이 시간 햇빛과 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나 거부하는 자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아직 죄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품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선포되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용서와 긍휼을 선포합니다. 내가 용서하고 내가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용납하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갈라졌던 가장 큰 이유, 분파가 생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판단과 사람들의 기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딱 1년 전인데, 그 마음을 함께 나누며 말씀을 마감하려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지금 미국에 있어서 이곳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시카고는 20년 전에 제가 공부하던 곳입니다. 막 한인교회들이 부흥하던 곳이죠. 지금 이곳 시카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깨어지고 교인 간의 갈등으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났더니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시카고에는 교인 천명쯤 되면 다 깨집니다. 그리고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어떤 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목회자가 한 교회 목회를 하면서 교인 2천 명이 넘으면 대개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세미나가 생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세미나가 많습니다.

무엇을 이루었고, 이룬 것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교회가 나누었던 순수한 복음을 잊어버리고, 우리가 이룬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지혜는 사라지고 인간의 지식이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깨어진 교회의 특징은 복음이 사라지고 자신의 성취에 대한 자랑 때문은 아닐까?

누가 성공을 이루었는가를 다투기 시작하면서 복음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고린도전서 2장 전반부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지 성경 인용)

"...오히려 나는 쉽고 분명하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전했고, 그다음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결국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 누구도 이 같은 것을 보거나 듣지 못했고 이 같은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통해 그 모든 일을 여러분 앞에 다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일어나는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조금은 성급하게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만나 교회에서 담임목사로서의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가? 처음 담임목사가 될 때처럼 많이 배우려 하지 않는 제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와서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배우려고 했던 내 모습이 아니라, 이것 저곳에 불려다니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이죠.

가장 심각한 문제, 배우는 시간보다 쏟아놓는 시간이 많다는 것.

더 이상 배우지 않는 리더는 리더의 자격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가장 거룩한 반성을 이곳 게렛신학교에서 새벽에 하는 셈이죠.

우리의 삶에서 내가 하는 일이나 내가 이루는 일들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이 하셨음을 주장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관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겸손이란 늘 배움에 목말라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것이 순종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들로 인해 일하시는 이유인 듯합니다.

설교ㅣ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강해설교 #오늘의설교 #김병삼목사 #만나교회 #고린도전서

지금 인기 많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