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이선규 목사] 현대를 가리켜서 '속도 시대'라고들 합니다. 이 속도 개념 속에서 현대 문화는 발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달리는 자동차 일지라도 때로는 방향을 전환 시킬 수 있는 핸들이 중요하고 브레이크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고 잘 달리는 자동차일 지라도 핸들이 고장 나거나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 그 차는 언제인가는 충돌하게 되거나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잘 달리는 자동차처럼 목표를 향하여 힘 있게 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심히 달음질을 하다가도 때로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을 점검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방향을 때로는 전환 시킬 수 있는 인생의 핸들이 필요 합니다. 자기가 지금 출세하고 있다. 성공하고 있다, 사업이 잘 되고 있다 모든 것이 번창하며 목표가 성취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달리다 가는 핸들이 없는 자동차처럼 또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파멸에 이르는 때가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는 중년의 신사가 숱한 심리적 갈등과 위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전환 시킨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여리고의 세무 서장으로 있는 사람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로마 정부로 부터 세금을 부과 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로마정부가 한 지역을 입찰을 주면 그 지역에 세금을 부 과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외면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가정도 있고 지위도 있고 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 적으로는 숱한 고민과 갈등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역사 학자인 '요세프스'는 말하기를 "여리고 성에서 제일 큰 면허 있는 도둑놈을 찾는다면 그것은 삭개오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는 유대인으로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처럼 불의와 부정한 일을 해온 이 삭개오란 사람에게 있어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삭개오란 그 이름의 헬라어의 뜻입니다. 그것은 순결하다. '정의롭다' 는 뜻으로 그가 해온 일과는 정 반대입니다. 적어도 삭개오의 부모는 그를 낳은 후 이 아기가 커서 순결하고 깨끗하며 정의롭게 살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라면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 했습니다.
순결하다는 이름의뜻을 가지고 있는 그가 가장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사실 저나 여러분이나 할 것 없이 부모라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줄 때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을 지어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 아이가 장차 커서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러나 이름을 가진 그가 떳떳하게 살지 못했고 뭇 사람들의 증오와 멸시와 적대의 대상 불의와 부정의 대표자로 살아온 사람 이제 세무 서장의 자리에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동네에서 만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제까지의 삶과는 정반대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 에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주와 증오의 대상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동네에서 만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제 지난날의 삶과는 정 반대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 할 만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주와 멸시의 대상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외롭던 그에게 예수님이 참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삭개오의 생애는 예수를 만나는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변화 될 수 있었을까요? 삭개오의 구도자로서의 자세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모하는 열심을 들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라고 하였습니다. 키가 작은 것은 내적인 장애입니다. 사람이 많은 것은 외적인 장애로 예수님을 만나기가 어려운 입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돌 무화과 나무위에 올라가는 열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만남을 위한 이런 열심히 없었다면 '다음 기회에.......' 하고 돌아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어이 예수를 보고야 말리라"하는 열심이 있었기에 그는 어른이며 부자요 세리장인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주위에 많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무위에 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바로 이 삭개오의 열심이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에 그는 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를 만나고자하는 마음에서 자기 사무실에서 뛰쳐나갔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구하는 자는 얻게 됩니다. 찾는 자는 찾게 됩니다.
나무에 올라갔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군중들만 바라보고 있었으면 주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도 오직 예수님만 주목하였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쳐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청춘 남녀의 눈이 마주치면 결혼에 골인하게 되고 선생과 학생의 눈이 마주치면 교육이 바로 되고 상인과 손님이 눈이 마주치면 거래가 이루어지고 교회에서 목사와 교인의 눈이 마주치면 신령한 예 배가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려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중도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 '한 결 같이'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성장 부흥 발전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새 사람 운동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가 부르실 때 삭개오는 '예' 하고 뽕 나무에서 내려 왔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구경으로 써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부르실 때에 예하고 뽕 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현대인들 중에도 예수를 만나 보고자 뽕 나무 위에까지는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교회에는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예' 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적습니다.
구경군은 많지만 참 신자는 많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세에 참 믿는 자를 보겠느냐? 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고 우리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구경꾼만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돌 무화가 나무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셋째, 삭개오는 뽕나무에서 내려온 것만이 아니고 예수를 영접해 들였습니다.
집안에 그리고 자기중심에 기쁨으로 영접해 들였습니다.
십년 20년 한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를 자기 가정에 자기중심에 영접하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좌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우리의 생각과 생활을 주장 하시게 되면 우리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주님이 내 마음속에 계시면 내 마음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태양 되시는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면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임할 것입니다.
넷째,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해 들였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생활로 나타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 복음 "8절에 보면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던 예수님은 너무도 기뻐서 "오늘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이집에 머물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여기 '급히 내려와'의 응답이 자아 혁신의 출발입니다. 한 사람으로 믿지 못 하게 하는 사탄의 전술은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의 부하에게 보낸 편지에 "너는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젊은이에게 절대로 예수가 나쁘다 기독교가 틀렸다고 말하지 말라. 좋기는 좋다고 해라 예수도 기독교도 좋다고 해라.
그러나 지금은 말고 조금 있다가 믿자고 해라. 그 유혹에 동의하면 너는 성공이다.
조금 있다가는 영원히 없기 때문이다. 누가나 다 차차 하겠다 합니다. 그러나 차차는 영원히 없는 차 차입니다. 삭개오의 급히 내려오는 행동이 중요 합니다. 그 주체는 나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를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기뻐하며 예수를 모셔 드렸습니다.
위정자와 국민이 똑같이 아니 지도자가 솔선해서 정의에 서서 기쁨으로 빨리 정치 경제 정의를 내 생활에 구현 하고 국가 시책에 반영 시켜야 합니다.
빛이 내 속에 비치면 어둠은 저절로 물러갑니다. 예수께서 우리 속에 오시면 검은 마음도 스스로 정화 됩니다.
썩은 부위에 새로운 부위가 돋아납니다.
부패가 집에서 시작 했듯이 구원도 집에서 시작 합니다. 돌이키는 결단과 보상 하는 회개가 있는 곳에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는 주님의 축복이 선언 됩니다.
집은 가정입니다. 직장은 집의 연장입니다. 나라는 큰 집입니다.
주님이 나라를 창조 하시고 이 땅에 하늘나라 세우시는 위대한 혁명은 한 사람의 자기 혁신을 단위로 하고 장소는 집에서 시작 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족의 살길은 자아 혁신이 라고 일찍이 제창 했습니다.
나라를 망친 국치의 원인을 일본의 침략이나 이 완용의 매국보다 우리 민족성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거짓 말 거짓 행실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내 평생에 죽어도 거짓말을 하지 아니 하리라.
그는 무실역행(실實 力行) 참을 힘쓰고 행을 힘쓰자는 것을 나라 찾는 민족성을 재건하는 교육 훈련의 지표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망국의 독소가 거짓의 결과인 부정부패가 추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에서 부정부패의 요소가 정화되며 일소하기에 피나는 결단을 주님은 요구 하십니다. 삭개오의 자아 혁신, 가정의 정화가 집권층으로 부터 말단 민초에 이르기 까지 우 리 혁신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민족의 위기 가정의 위기를 극복 하느냐에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과제는 우리 각 자가 삭개오와 같은 정신으로 새 사람이 되고 새 출발 하는데 있습니다.
그 길은 첫째 예수를 만나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우리 가정에 우리 마음 중심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셨으면 세상의 그 무엇에 목적을 두는데서 탈피하여 예수님께 여러분의 삶을 목적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던 사도 요한이 요1:12절에 "영접 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 구원 받은 하나님 의 자녀들이 되어 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설교ㅣ이선규 목사(금천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