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제가 작년 즉 2014년 5월 13일 오후 1시 30분 여기 청송교도소에 와서 수감생활을 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 즉 2015년 5월 12일 오후 1시 30분 꼭 일년 만에 여기 다시 와서 여러분들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기학 목사님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작년에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설교를 하기 전에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했는데 그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저는 11살 때까지 북한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11살 때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북한 평양에 남겨두고 혼자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와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부족함이 없는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저의 아버지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11살 때인 1948년 8월 캄캄한 밤에 어른들 몇 사람들과 함께 캄캄한 밤에 38선을 넘다가 인민군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섰지만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40여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강을 건너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남한에 와서 이모님을 만나서 함께 살게 되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서울 중학교 서울 고등학교 서울 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 가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귀국한 다음 지난 40여 년 동안 목사와 교수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중국 북한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폈습니다. 은퇴 후 지난 7년 4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한 다음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마 9:13 말씀을 아주 좋아하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의인들과 건강한 사람들보다는 죄인들과 병든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죄인들과 병든 자들에게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다음 울면서 회개한 다윗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다윗을 가장 귀중한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시고 가장 귀중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악독이 하늘에까지 가득 찬 니느웨 사람들의 죄까지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병든 자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도 열병환자도 모든 병든 자들도 귀신 들린 자들도 모두 다 고쳐주셨습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그 당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돈만 알던 죄인중의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고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한 창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사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기도 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7:50). 어떤 성경 학자들은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이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였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후 한 평생 눈물을 쏟으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겼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잡아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이는 악독한 로마 군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24).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강도 한 사람에게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랍고 놀랍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는데 성자 예수님께서도 의인들을 부르러 오시자 않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인들을 주님의 종들과 사역자들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작년에 제가 한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작년에 설교 마지막 부분에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다섯 가지 삶의 모습을 간단하게 말씀 드렸는데 그것은 "회개"하면서 사는 삶이고 "예배" 드리면서 사는 삶이고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지니고 행복하게 사는 삶이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섬기면서 사는 삶이고 그리고 "천국 소망"을 지니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를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길선주는 반 기독교적인 불교와 선도의 두목이었습니다. 이기풍은 반 윤리적인 평양의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교와 선도의 두목이던 길선주 도사와 평양의 깡패 두목이었던 이기풍을 부르시고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으셨습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길선주 도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로, 길선주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습니다. 그는 1869년 3월 15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지 3년이 지난 해였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길선주는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열한 살 때, 열 여섯 살 되는 신부와 결혼을 했습니다. 누나 같은 아내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는데 부엌에 가서 누룽지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길선주가 몸과 마음이 약한 마마보이는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체구와 건장한 기력을 가진 굳건한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장사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소년 시절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살 때부터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창일이라는 도사를 만나서 그가 써준 '산신차력'이란 주문을 밤낮으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대성산 절에 가서 일 주일 동안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자 영이 내려 온 몸이 떨리고 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길선주는 21살부터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밤낮으로 옥경의 구령삼정 주문을 외웠습니다. 때로는 21일 때로는 49일 때로는 100일씩 기도하며 주문을 외웠습니다. 결국 길선주는 선도의 영험과 신통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길선주는 선도에서 큰 힘을 얻어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방망이를 손으로 분질렀으며, 웬만한 개천은 단 숨에 건너 뛰었습니다. 차력에 성공하고 선도에 통달한 길선주의 이름이 널이 알려지자 평양 시내에 그가 나타나면 그를 가리켜 '길도사'라고 부르며 수근거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계속해서 수도에 힘을 다했습니다.
둘째로,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890년부터 평양 시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이 파란 양귀자 즉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서양 교를 전하는데 한번 거기에 빠지면 혼이 뽑혀서 미치고 만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는 1890년 1월 제물포를 거쳐 경성에 도착했고 1893년부터 평양에 와서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길선주는 평양 널다리 골에 살고 있었는데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새 교를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하여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와 담론은 나누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전도했습니다. 길선주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쏭달쏭하여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마음이 열렸습니다. 길선주는 마펫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들으므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습니다.
길선주는 진리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 친구 두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문흥준씨와 김종섭씨 두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김종섭은 길선주에게서 선도를 배운 그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돌아온 김종섭이 길선주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는 그의 배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도와 서양 도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번민이 더해갔고 소화불량까지 생겼습니다. 길선주는 결국 마음에 번민을 가지고 깊은 밤 이른 새벽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선주도 고민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를 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지금 심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봉하던 선도는 정말 섬길만한 도인지 의심스럽고, 예수교에는 과연 영생의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이 마음을 가라앉아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수삼일간 계속했습니다. 밤이 깊어 새벽 한 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정말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탕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는 순간 하늘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길선주는 너무도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을 때 그의 몸은 불덩어리가 된 듯이 뜨거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길선주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아침에 그를 찾아온 김종섭이 이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뻤습니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성경책을 끼고 널다리 교회로 가서 예배에 참석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길선주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공 기도를 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 너무나 유창하고 간절하고 은혜롭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길선주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셋째로, 길선주는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기록을 읽을 때는 환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7년 8월 15일 길선주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는 것을 보고 길선주는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가르침으로 선도에 입문했던 의제 김찬성에게도 전도하여 그로 하여금 흐느껴 울며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김찬성은 후에 목사가 되었고 그의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는데 두 아들 중 한 사람은 저의 아버지와 함께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함께 순교한 김화식 목사였습니다.
길선주는 1898년 30세 때 평양 널다리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널다리 교회는 그 이듬해인 1899년에 장대현으로 옮겼고 1900년에는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1901년에는 33세 때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는 조사(전도사)가 되어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설교와 기도와 성령충만한 그의 목회 사역은 장대현교회의 급속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많은 핍박과 탄압이 있었으나 길선주 조사는 더욱 더 기도에 파묻혔습니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는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한시간씩 성경을 읽고 암송했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드디어 1906년부터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이 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설교는 흐르는 시냇물 같이 회중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회중들은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회중은 은혜의 도가니에 묻혀 교회당을 떠나지 않았다. 죄인 잡으러 왔던 순표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려 왔던 중이 개종하고, 신부가 은혜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 장로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다."(최현, 「빛을 남긴 믿음의 위인」 p. 182).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1백원은 수고비조로 인정하여 자기가 소유하였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 (김광수, 「한국기독교인물사」 pp. 140,141).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