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칼럼] 인생은 도전 신앙은 반전

칼럼
김범수 목사(워싱턴 동산교회, MD)

흔히 누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대답할 말을 마음속에 두며 하루를 시작한다. 성경에 사도 베드로는 누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한 것처럼 늘 하루에 새벽을 열고 성전 문을 열 때마다 그렇게 묻는다. “왜 오늘 너는 성전문을 여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어떻게 이 하루를 열고자 하는가?” 무슨 동굴의 철학자도 아니면서 괜히 그렇게 새벽바람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 본능적으로 머릿속을 휘어 저으며 신선한 질문을 던진다.

어느 록 가수가 술 취한 듯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있겠지 흐린 날도 날이 개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어떤 때는 설령 목사라 하더라도 이런 유행하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생에 관하여, 그리고 신앙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내일(來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일은 막연한 것이다. 내일 일을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어제의 일에 얽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힘을 내어 살아가야 할 말은 “도전”이라는 말이다. 도전은 단순한 욕망과 욕심에 이끌리는 허영이 아니다. 없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분수처럼 뿜어대는 허풍도 아니고 있는 것을 과장하기 위해서 포장하는 허세도 아니다. 단지 그 도전은 있는 그 자신의 모습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움직이는 성실함이다. 성경에서 요셉은 꿈을 꾼 사람이었다. 그 꿈은 내일을 향한 자기설계였고, 장래에 있을 일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꾼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이 노예라고 하더라도 그 노예의 신분에 성실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 성실함이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고, 자기의 형제들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을 힘들어도 버티는 사람이 도전이라는 그 어려운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믿음은 상식이나 지식이나 평범한 것을 넘어선 세계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면 서도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세상에서 얻은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다. 이게 미친 일이 아닌가? 왜 그렇게 필요하고 좋은 세상의 지식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반전(反轉), 그리스 말로는 패러독스이다.

가능하지 않는데 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데 있고, 볼 수 없는데 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히브리서11:1)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찌 물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실 수 있으며, 어찌 남자가 아니고서 성령으로 예수님이 잉태가 되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신앙인들은 달라야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공과 지식과 권력도 전혀 다른데 있다. 그것은 마음에 있다. 겉으로 부자가 아니라 마음의 부자가 되어야 한다. 자랑하듯 사랑해서도 안 되고, 충성스런 봉사자로 나타내서도 안 된다. 죽도록 미워도 죽도록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반전이다. 일반과 다른 범상함, 보통을 넘은 특별한 세계의 사람, 그 사람들이 신앙인들이다. 그 사람들이 인생을 도전할 수 있다. 오늘의 성실함으로 말이다.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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