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한국 수출기업을 위협하고 있다.
27일 무역·금융업계 등에 따르면 엔화 가치는 아베노믹스 시행 3년 만에 56.7% 급락했다. 2012년 9월 77.49엔이던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12월 121.46엔을 기록했다. 원·엔 환율 역시 가파르게 하락하다 급기야 지난 23일엔 100엔당 900원 선이 한때 붕괴되기도 했다.
금융업계에선 올해 말 엔·달러 환율은 120~125엔, 원·엔 환율은 850원선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같은 엔저 가속화는 향후 2~3년 이상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어 대외의존도가 높고 일본과 주요 수출 품목이 중복되는 한국에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무선통신기기 등 엔저효과 뚜렷
아베노믹스가 본격 시행된 2012년과 지난해 한국과 일본의 권역별 수출액을 비교한 결과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디스플레이 등 품목에서 엔저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자동차 분야는 멕시코와 중국에서 엔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멕시코의 경우 한국 수출액은 2012년 6억6000만 달러에서 4억7000만 달러로 줄어든 반면 일본 수출액은 같은 기간 8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늘었다. 중국에선 한국 수출액이 17억 달러로 보합세를 보였으나 일본은 51억 달러에서 59억 달러로 증가했다.
러시아의 경우 경기침체와 맞물리면서 한국과 일본의 수출액이 각 31억 달러에서 24억 달러, 74억 달러에서 48억 달러로 함께 감소했다.
KOTRA 관계자는 "자동차의 경우 멕시코와 중국에서 엔저 효과가 한국의 수출경쟁력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며 "러시아에서는 엔저와 러시아의 경기침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무선통신기기는 일본기업이 엔저를 앞세워 중국과 멕시코에서 약진했다. 중국 시장 점유율은 한국이 21.33%에서 20.31%로 줄어든데 반해 일본은 3.67%에서 5.95%로 증가했다. 멕시코에서도 한국은 4.15%에서 2.66%로 감소했지만 일본은 0.94%에서 1.76%로 늘어나 경쟁이 격화될 수 있다.
디스플레이의 경우 중국에서 엔저 영향이 두드러졌다. 중국은 디스플레이 수입 규모가 2012년 559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로 줄었는데 한국 수출액도 197억 달러에서 162억 달러로 함께 감소했다. 하지만 일본은 오히려 40억 달러에서 47억 달러로 증가하며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KTORA 베이징무역관 관계자는 "디스플레이의 경우 거대 시장에서 엔저의 영향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중국에선 수입시장 축소와 엔저 현상이 한국 수출액 축소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석유제품 역시 중국의 수입시장 축소와 엔저로 2012년 89억 달러에 달하던 한국 수출액은 지난해 55억 달러로 떨어졌다.
선박류는 엔저가 한국 수주량이 미치는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중국 시장에선 한국이 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및 선박용 대형 엔진 위주로 수출하는 반면 일본은 일반 선박 위주여서 엔저의 영향이 미미할 것으로 예상됐다.
◇전자·철강 등 엔저 효과 제한적
반면 전자기기와 철강, 섬유류 등은 엔저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전자기기의 경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기술력과 마케팅으로 선방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일찍부터 브라질 현지에 진출해 좋은 실적을 거두고 있다. 초기 브라질 가전 시장을 선도했던 소니와 파나소닉 등의 실적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중국과 미국에서도 한국 기업이 점유율을 높이며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KOTRA 뉴욕무역관 관계자도 "TV와 미디어 제품을 중심으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되고 있지만 한일간 경쟁구도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아니다"라며 "일본 기업의 수익성이 개선되는데 그치는 정도"라고 전했다.
상파울루무역관 관계자도 "일본 기업 제품이 한국 업체의 디자인과 마케팅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한국 기업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철강 분야는 한·일간 경합도가 높은 편이지만 중국과 미국에서는 세부품목이 다르거나 차별화한 제품으로 엔저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다만 싱가포르에서는 일본과 중국 제품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우며 바짝 추격하고 있어 국내 업체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석유화학 제품 역시 일본과 경쟁 품목이 달라 엔저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무역관 관계자는 "미국 뿐만 아니라 독일에 대한 수출 역시 한일 경합도가 낮아 엔저 효과가 크지 않다"며 "환율 영향보다는 유럽 현지 기업과의 경쟁이나 경기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자동차부품은 한국이 선전했다. 한국의 중국 및 미국 자동차부품 수출액은 모두 늘어난 반면 일본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점유율 역시 같은 경향을 보였다. 섬유류도 일본과 직접적으로 경합하는 제품이 많지 않아 엔저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반도체의 경우 일본 제품보다 대만 제품이 더 큰 위협으로 작용했다. KOTRA 관계자는 "한국의 미국 수출액은 크게 감소했지만 일본의 수출액과 점유율을 고려하면 엔저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싱가포르에서의 한국 점유율 감소 역시 엔저 때문인지 대만산 때문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日 가격인하-대규모 R&D 대비해야"
무역업계에선 엔저 장기화에 대비해 국내 기업들이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역업계 관계자는 "일본 글로벌 기업이 이윤 우선 기조에서 방향을 전환해 시장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수출가격 인하폭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축적된 수익으로 대대적인 투자에 나설 경우 한국 기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한국 기업은 품질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수익성을 추구해야 한다"며 "대내외에 민감한 중소기업은 생산성 향상과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일 양국의 해외생산 확대와 자유무역협정(FTA) 효과, 특정 제품군에서의 한국 브랜드파워 등은 엔저로 인한 한국 수출경쟁력 약화를 일부 상쇄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활용한 전략적인 대응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