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이후 새로운 한 주간을 지나면서 어느새 그 감격이 희미해져 버린 느낌이다. 참 야속한 인생이다. 그러나 이 야속함이 우리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성경에 보면 가끔 결정적이라고 할 사건이 그 순간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사건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건이었다. 이 놀라운 사건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체험으로 이젠 완전한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성경은 홍해를 건넌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리고 목마른 까닭에 모세를 향해 불평 불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약의 또 다른 의외의 장면은 갈멜산 정상에서 벌어졌던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 간의 싸움이다. 아합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헛된 우상인 바알을 섬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1:850의 대결을 벌인다. 그리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방법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그 장면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그 결과 아합왕을 비롯, 그동안 하나님을 떠났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 후에 아합과 이세벨은 더욱 더 강력하게 하나님을 배척하여 엘리야를 핍박하고 그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 비슷한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다름 아닌 주님의 부활이후 제자들의 모습이다.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은 자신들이 끝까지 믿지 못했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 손의 못자국도 만져보고 옆구리의 창자도 만져보았다. 부활의 목격자들이 된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달라져야 했다. 그 동안의 불신을 탈탈 털어버리고 이제는 죽어도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해야 당연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의 주님을 몇 차례나 만났던 이들은 21장에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닌 고기 잡은 어부로 돌아가 있다. 이것이 현실이고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이다. 아무리 놀라운 체험, 심지어 부활의 체험이라 할지라도 그 후 또 다시 찾아오는 일상과 현실 앞에 슬그머니 그 교훈과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감사하게도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다시 갈릴리 어부의 일상으로 돌아간 그들을 찾아오셔서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 그리고 이후 그들의 삶은 정말 변했다. 그래서 기적보다는 기적 그 이후가 더 중요하고, 부활보다는 부활 그 이후가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진정한 부활의 삶은 지금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