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절기 가운데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이 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 감사절은 추수기에 얻은 열매로, 그리고 부활절은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는 봄을 맞이하는 시기에 이스터 축제를 가진다. 무엇보다 부활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유는 죽음 후에 영생의 세계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 살아나시고 사망의 권세에서 부활하셔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이다.
신약성경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40번 나오고 있다. 마태복음 22장 23절에 처음으로 나오는 부활(Resurrec-tion)이라는 말은 '죽었다가 다시 영원히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고전 15:4, 52 참고). 그러나 죽었다 다시 죽을 몸으로 되살아나는 소생(蘇生)과는 다르다(막 5:35-43 참고).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할 만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 내용이다. 신약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는'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계 20:6)라고 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라고 선언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나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죽으심)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모두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할 내용이다.
1. 원어상의 의미
원어상의 의미로 '일어서다', '오르다', '깨우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anastasis)와 그 명사형인 '아니스테미'(anistemi) 그리고 '에게이로'(egeiro) 등의 단어들이 부활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물론 이 단어들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마 22:24; 26:62; 27:53; 막 14:57, 60; 눅 4:14; 22:45; 행 7:18 등), 대부분은 부활에 대한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에게이로'는 수동태(일으킴을 받는다)로 예수님의 생명의 부활에 대해 주로 사용되었으며, 반면 '아니스테미'와 '아나스타시스'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소생시킨 것과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부활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제외하고 두 동사의 주체는 거의 언제나 예수님이고, 이들이 타동사로 사용될 때에는 주로 하나님이 주체가 되며 예수님은 객체가 된다.
이것을 일괄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는 '에게이로'에 의해 표현되며, 인간 경험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할 때에는 '아니스테미'가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실 경우,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죽어 장사된 주께서 다시 육체를 지닌 생명으로 일깨움을 받는다는 것으로 말해진다(행 2:31, 34; 엡 5:14).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하나님을 주체로 하고 예수님을 객체로 해서 묘사되는 것만은 아니다. '에게이로'는 중간태로서 자동사의 의미를 취하여 예수님을 주체로 만들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는 것이다(롬 6:9; 8:34; 막 14:28; 16:6; 마 27:63). 이러한 용법의 변화는 부활시키는 능력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이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신 아들 역시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구약에서의 부활사상
구약에는 부활에 관한 명확한 내용이 없으며, 특히 오래된 책일수록 그렇다는 주장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거리가 멀다. 성경의 초반부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특히 창세기 5장은 모든 사람들의 일대기가 '죽었다'로 끝나고 있지만 하나의 예외적인 인물 에녹을 등장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또한 영혼의 미래 상태에 대한 신앙의 표시로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매장하는 행위와 명백히 구별되는 표현이다(창 25:8-9; 35:29; 49:29, 31, 33).
(1)족장들의 부활사상
족장들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 소중히 취급했는데, 이것은 부활에 대한 일종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창 47:29-31; 50:25; 출 13:19; 히 11:22).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사실을 부활 신앙과 관련시키고 있다(히 11:17-19).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에서도 구약의 부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 이것은 족장들이 단순히 어떤 존재의 상태로 계속 생존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그들이 부활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2)욥이 말하는 부활의 사상
욥기 19:26의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나의 육체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구절은 욥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신약에서 시편 16:8-11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되고 해석되었다(행 2:27; 2:31). 또한 '스올'(sheol)에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시편 기자들의 소망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다. 이러한 확신에는 부활에 대한 분명한 소망의 씨가 포함되어 있다.
(3)선지서에 나타난 부활사상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빈번하게 부활 사상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과 함께 이사야 25:6-8, 에스겔 37:1-10과 다니엘 12:2은 구약의 부활 사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본문들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단 12:2).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영생의 소망은 단지 영혼이 사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었다. 그것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전인적 부활을 가리킨다. 다만 '생명과 썩지 않을 것'(딤후 1:10)이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히 드러났지만 구약에서는 아직 완전한 빛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부활 신앙의 사상적 기원을 포로 시대나 그 후의 페르시아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부활 사상이 족장 시대로부터 전수된 성경의 가장 오래 된 개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의해 거부될 수밖에 없다.
3.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들
신약에서의 부활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나머지 내용들은 이에 대한 부연 설명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견해들도 있었다.
(1)도적설로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면 유대인들이나 로마 당국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면, 그러한 '조작행위'로 제자들의 삶에 그토록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듯이,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거짓말보다 인간을 더 소심하게 만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고의적인 거짓말이 한 무리의 겁쟁이들을 그처럼 용감무쌍한 사도로 변화시켰으며,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했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한 유대인들이나 로마 당국자들이 시신을 숨겼다는 주장은 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얼마 후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담대히 증거하고 다닐 때 왜 그들은 썩어가는 예수님의 시체를 내보이며 예수님이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상당한 뇌물을 받았던 파수꾼들의 거짓 증언이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마 28:11-15).
(2)기절설로는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심한 출혈로 인해 잠시 기절했다가 무덤의 서늘한 기운과 향료의 좋은 냄새, 그리고 몇 시간의 휴식을 통해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막 15:44) 하고 이상히 여겼다는 본문을 근거로 한 것이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빨리 죽으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군병들이 ...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2-34)라고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3)무덤 오인설로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주장으로, 비어 있는 무덤을 보고 울고 있던 중 희미한 문지기의 모습을 보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이때가 '해 돋은 때'(막 16:2)라고 말한다. 이로 보아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찾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들이나 제사장들이 '새로운 종교'가 확산되고 있을 때 왜 예수님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무덤이나 시체 자체를 곧바로 제시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4)지어낸 이야기 또는 전설로는 성경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실제 사건 기록이라기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기록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시기는 부활 사건이 전설로 발전해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또한 부활 사건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설정하기보다는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비중 있는 인물로 대치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5)환상설은 부활을 부인하는 가장 그럴듯한 제의는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객관적인 경험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 또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환상을 경험하게 되는 몇 가지 전제조건들 즉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감수성이 예민하고 공상을 많이 하는 사람들), 적당한 시간(저녁, 밤, 새벽)과 장소, 장기간에 걸친 반복 등과 같은 것들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부류는 너무나 다양했으며(고전 15:3-8), 예수님을 목격했던 시간대와 장소 또한 다양했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은 40일 간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에만 한시적으로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환상을 보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즉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바가 제자들에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고 간절히 바랐던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과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었다. 분명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간절한 기대감이나 소망적 사고가 환상을 낳은 것은 아니며, 또한 환상이 그러한 기대감이나 소망을 갖도록 한 것도 아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며, 만질 수도 있었다(눅 24:39). 또한 제자들과 함께 걷기도 하셨으며(눅 24:15), 음식을 드시기까지 하셨다(눅 24:41-43).
4.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 간의 행적
(1)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막 16:9)에 대해서 마태는 두 여인 곧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마가는 살로메를(막 16:1), 누가는 구사의 아내 요안나를 추가하고 있음(눅 24:10)
a.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눅 24:34; 고전 15:5) b.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눅 24:18-35) c.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나타나심(막 16:14; 눅 24:36-49; 요 20:19, 24) d. 두 번째 주일(안식일로부터 8일 후)에 제자들이 모였을 때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심(요 20:26-29) e.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요 21:1-14) f.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심(요 21:15-19) g.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심(고전 15:6) h.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심(고전 15:7) i. 감람산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시고 승천하심(막 16:19; 눅 24:50-52; 행 1:9-12).
5.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여러 반응들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공포(마 28:4), (2)거짓말(마 28:13), (3)뇌물(마 28:15), (4)경외심(마 28:4), (5)의심(마 28:17), (6)큰 기쁨(마 28: 8), (7)경배(마 28:17) 등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효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부활은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한 영향을 미쳤다. 마태는 여러 반응들 가운데 특별히 '경배'라는 반응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태복음 28:9에 나오는 여인들, 그리고 28:17에 나오는 열한 명의 제자들은 경배로 반응했다. 장로들과 군병들의 거짓말과 뇌물이라는 반응은 이 두 반응 사이에 샌드위치 속처럼 끼여 있다. 즉 마태는 경배야말로 부활에 대해 보여야 할 가장 적절한 반응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6.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1)사렙다 과부의 아들(왕상 17:17-24) (2)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35) (3)엘리사의 뼈에 닿은 시체(왕하 13:20-21) (4)야이로의 딸(마 9:23-25; 막 5:35-43) (5)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눅 7:11-15) (6)베다니의 나사로(요 11:43-44) (7)많은 성도(마 27:52-53) (8)도르가(행 9:36-40) (9)유두고(행 20:9-12)
7.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는 명백한 증거들
누가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확실한 많은 증거로'(행 1:3) 부활하신 사실을 알려 주셨다. 그 확실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1)'비어 있는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첫 번째 증거다(눅 24:1-3). '빈 무덤'을 달리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설득력이 없음은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다.
(2)무덤에 있던 천사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마 28:6)라고 한 증거이다.
(3)수많은 부활의 목격자들이 그 증거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자신 등).
(4)사도들의 증거(행 2:32; 3:15)와 함께 그들의 변화된 삶 자체가 또한 증거다. 두려움과 슬픔, 낙심과 좌절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갑자기 변화를 받아 세상을 소란케 하고 뒤엎는 사람들이 되었으며, 어떠한 반대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자들로, 공회에서도 담대히 부활에 대해 증거 하는 자들로 변했는지는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5)오늘날 지켜지고 있는 '주일'(Lord's Day)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안식 후 첫날에 드려진 초대교회의 예배(행 20:7; 고전 16:2)는 그날 새벽에 발생했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기초한 것이다(마 28:1; 막 16:2, 9; 눅 24:1; 요 20:1, 19).
(6)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전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의 역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 공동체의 기원은 성경의 기록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나온 바로 그때이다.
<내일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