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제대로 아는 건 딱 한가지뿐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날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그분이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진리, 그거 하나만 확실히 알아요. 다른 건 잘 몰라요."
저와 여러분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만을 확실히 알고 확실히 믿고 확실히 사랑하고 확실히 붙잡으면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십자가"와"부활"의 주님만을 알기로 그리고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십자가"와"부활"의 주님을 3천 여명에게 생명을 쏟아 바치면서 전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행2:36).
사도 베드로가"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전파했을 때 3천 여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을 알기로 그리고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1:2). 그래서 가는 곳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힘을 다해서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느니라"(행17:3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사도 바울은"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오늘 여기 함께 모인 것은 우리들도 사도 베드로처럼 사도 바울처럼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알기 때문이고 믿기 때문이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주일 새벽 카타콤에 모여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며 생명의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부활주일날 우리들도 모두 함께 모여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며 생명의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또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붙잡을 때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오늘 제가 할 설교 제목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들이 날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여야 할 고백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즉시 하늘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 동안 세상에 남아계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10여 차례나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아직도 바로 알지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못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셨고, 저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고, 저들의 배신을 충성으로 바꾸어주셨고, 저들의 자기 중심적 삶을 주님 중심적 삶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주님께서 40일 동안 땅에 계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사건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어두울 때 막달라 막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요20:11).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사랑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사랑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오셔서 "마리아야" 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랑은 사랑과 통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사로잡혀서 "랍오니여, 선생님이여" 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만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사도적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달려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막달라 마리야의 인생은 이미 새롭게 바뀌어져 있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로부터는 완전히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몸과 가슴과 영혼과 세포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찬양과 섬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만을 전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가장 생생한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는 항상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의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다른 여자들이 무덤에 찾아왔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28:1).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고 조금 후에 다른 여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9-10)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먼저 나타내 보이신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도 사랑은 사랑과 통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은 남성들이 아닌 여성들이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눅23:27).
무덤에 찾아왔던 몇몇 여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저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저들의 몸과 가슴과 영혼과 세포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찬양으로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자 베드로였습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24:33,34).
베드로는 배신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통곡하며 회개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번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의 주님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후에도 여러 번 배신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삶이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배신하기 쉬운 우리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또 만나고 또 만나야 할 것입니다. 배신자 베드로는 늘 손 수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네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의심과 슬픔에 쌓여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던 이름 없는 두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두 제자가 주님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저들의 눈이 가리워졌고 저들의 마음에 의심과 슬픔이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고 마음이 냉랭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들이 아닌 일반 평신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가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5).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저들과 대화를 계속하셨습니다. 한참 대화를 하시다가 저들의 믿지 못함과 의심함을 책망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풀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그리고 저들과 함께 마을에 들어가서 음식을 잡수시면서 떡을 떼어서 저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의심과 슬픔이 살아졌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서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0-32).
결국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다시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달려가던 발 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습니다(눅24:32-35).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의 삶도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은 그 후 어디를 가든지 불신앙과 의심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자기들을 찾아오셔서 자기들의 눈을 밝혀주시고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주신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부활 주일 저녁 두려움과 불안에 쌓여 문을 닫아 걸고 함께 모였던 열 제자들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서글프고 불쌍한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라는 신분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제자들이 지녀야 할 믿음도 사랑도 헌신도 충성도 다 내어버린 서글프고 불쌍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두 제자들의 간증을 들으면서도 반신 반의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즉 주일 저녁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눅24:34-36).
황송하고 감사한 일은 이런 서글프고 불쌍한 모습을 지닌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괘씸한 놈들이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채찍을 드시는 대신 두려워서 떠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평강의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21).
그리고 의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20).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 하시고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 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의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못난 제자들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길로 "부활"의 길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내 디디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십자가"의 길과 "부활"의 길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또 만나야 할 것입니다.
불신앙과 두려움에 쌓여있던 열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부터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와 "부횔"의 주님을 증거하면서 살았고 "십자가"와 "부횔"의 주님을 증거하면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부활의 주님을 안 믿겠다고 고집하던 의심쟁이 도마였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도마는 극심한 회의와 절망에 빠져서 이리 저리 다니면서 방황을 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께서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인 주일 저녁에 그 곳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자기는 그것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도마는 철두철미하게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고 반항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한 주가 지난 그 다음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도마는 한 주간 동안 회의와 의심에 쌓여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방황을 하다가 그래도 함께 지내던 동료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6-27).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도마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포자기와 회의와 냉소와 반항 가운데 있던 자기를 찾아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 들고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20:28).
그때 도마의 운명은 바꾸어 졌습니다. 도마는 그 후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전하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었고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처럼 의심이 많아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주님을 증거하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하며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벌겋게 달군 접시 위에 던져지기도 했고 펄펄 끓는 가마에 던져지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잔인하게 창으로 허리가 찔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의심쟁이 도마는 한 평생 주님을 향해서는 울면서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주목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주일날에 나타나셨고 주일 저녁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후 부활의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날도 주일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1"10,11).
주일 저녁 예배를 폐지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그 만큼 주님 만날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곱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을 여러 번 만난 후에도 다시 디베랴 바다로 즉 세상으로 돌아간 일곱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데의 아들들과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요21:1,2,4).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미 세 번씩이나 나타나셨고 열 제자들을 포함한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여섯 번씩이나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일곱 제자들은 또 다시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세상으로 옛 직업으로 되 돌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요21:3).
참으로 서글프고 불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송하고 감사한 일은 이런 못나고 괘씸한 제자들을 부활의 주님께서 또 다시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괘씸한 놈들이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채찍을 드시는 대신 불신과 배신과 실패와 좌절과 공허함에 빠진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을 다시 찾아와서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책망이나 야단을 치시는 대신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말씀은 "너희에게 지금 아무것도 없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물고기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는 말씀은 "얘들아 지금 너희에게는 고기도 없고, 예수도 없고,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고,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라는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도 우리의 좌절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자만도 고집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지친 것도 우리의 탈진한 것도 우리의 공허함도 우리의 궁핍함도 다 아십니다. 형식과 껍데기만 남은 것도 다 아십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유창한 웅변과 각종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만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아무개 목사야, 아무개 전도사야, 아무개 장로야, 아무개 권사야,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길선주 목사가 지녔던 진실한 회개가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손양원 목사가 지녔던 순수한 사랑이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주기철 목사가 지녔던 지사충성이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한경직 목사가 지녔던 온유함과 긍휼함이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박윤선 목사가 지녔던 순수함과 단순함이 있느냐?" "얘들아,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지금 너희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은 솔직하고 간단했습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자기들의 실패와 공허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진정한 회개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솔직하고 투명하게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꾸미며 위선을 떱니다. "뭐 별로 좌절하지도 않고, 뭐 별로 허탈하지도 않고, 뭐 괜찮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 앞에 얼버무리고 거짓과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제자들은 솔직했습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제자들로 하여금 회개의 고백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진솔한 자기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러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다 해 주십니다. 진솔하게 자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배신과 공허함을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다 해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역의 방법을 새롭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선과 떡을 즉 주님 자신을 먹여주셨습니다. 깨어진 믿음과 사랑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깨어진 사명을 새로 부여해주셨습니다. 순교의 길까지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르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디베랴 바다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순수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보다는 유창한 웅변과 각종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 등 세상 유행이 깊이 빠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명예 등 세속적 유행에 깊이 빠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디베랴 바다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다시 새롭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다시 만나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 앞에 우리들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세속화의 죄를 진솔하고 처절하게 고백하면서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덟 번째로, 아홉 번째로, 열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은 500여 형제들과 야고보와 열한 제자들이었는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행1:3-8).
오백여 형제들은 그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모든 믿는 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였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시므로 야고보의 신앙을 확증시켜 주셨고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구비시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열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다시 나타나셨는데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선교 대 위임령을 부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열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다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만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3,6-8). "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은 자기 나라의 정치적인 독립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므로 모든 족속으로 주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한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살인자였고 교회를 잔멸하던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8:1,3).
사울이 살기가 등등하며 믿는 자들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갈 때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사울은 너무나 놀라서 땅에 엎드러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행9: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5,6).
사울은 그 후 삼일 동안 보지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택한 그릇이 되고 주님을 위하여 해를 많이 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의 운명과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이 있으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19-22).
사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1:1)이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입을 열어서 전파한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말로 설교로 전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온 몸으로 삶과 죽음으로 전했습니다. 그의 몸에 십자가와 부활의 흔적을 지니며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6:14,17).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토록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눈물로 고백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 전하다가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