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8은 필연적으로 논제 7로부터 추론된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 겸손도 없다. 겸손이 없는 곳에는 교만이 있을 뿐이다. 교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오만함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만이 없다면, 어디고 죄는 없을 것이다." (LW31: 47)
[기독일보=정진오 목사] 논제 8은 논제 7과 대위법적 비교(contrapuntal comparison)이다. 앞선 논제 7에서 의로운 자들의 행위에 대해 논한 루터는 뒤이은 논제 8에서 그와 대비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논한다.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한 의로운 자들의 행위도 죽음에 이르는 죄인데,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도리어 자신의 힘과 능력에 대한 확신 가운데 행한 행위들은 더더욱 죽음에 이르는 죄가 아니겠는가라는 점이다. 논제 7과 8에서 루터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이라는 이 문구는 상당히 낯설고 거부감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선포되는 거의 모든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는 루터의 이 논제들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문구로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는 것은 도리어 인간을 죄에 대한 처벌을 기다리는 율법의 노예로 만들 뿐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는 것은 중세 타락한 가톨릭 교회의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중세 가톨릭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심판'을 강조하며 면죄부 판매로 교회 부패의 극치를 가져온 반면,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시는 복음'을 강조하며 인간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루터는 논제 7과 8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루터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소교리 문답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루터는 십계명에 나오는 각 조항들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가르친다. 특히 십계명에 대한 설명 중 마감하는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벌하시므로 .. 그의 분노를 두려워하고 이 계명을 지키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역시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두려움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루터는 논제 8에 대한 부연 설명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 겸손도 없다. 겸손이 없는 곳에는 교만이 있을 뿐이다. 교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이 존재한다." (LW 31: 47)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인간은 누구인가를 규정짓는다. 루터는 인간이 너무 깊은 죄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사역을 높이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교만에 빠져 너무 쉽게 하나님의 행위와 힘을 망각하고 자신을 의존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루터에게 있어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에 대한 중요한 해독제와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만한 사람보다 비참한 사람은 없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교만한 자들은 심지어 자신이 죄와 죽음 아래에 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한다. ... 그들은 자신의 이러한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경배 받아야 할 하나님인양 자랑과 교만으로 나아간다." (LW 7:180)
루터는 창세기 강해에서 이 문제를 좀더 상세하게 서술한다: "스스로 우쭐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린 자들에게는, 그들이 죄를 멈추고 다른 이들에게도 한 사례로 경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이 나타나야만 한다."(LW 3: 222)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인간은 죄와 악의 위험성을 망각하게 된다: "만일 불과 물의 심판의 위험성이 없다면, 갑작스런 죽음과 악의 위험성이 없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 분이 주시는 축복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다." (LW 3: 225)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난 행운(good fortune)이 스스로 행한 선한 공적에 대한 하나님의 보답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루터는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 도리어 자신의 행위와 공적을 더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전적인 은혜가 아닌, 자신의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겸손해진 인간만이 자신보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으로 까지 나아간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 (LW 7:183).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과 신학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축복의 메세지'로 가득 차 있다.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을 찾아보기 힘들다.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을 좌절시키고 낙담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와 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된 존재인가를 잃어버린 채 자신의 행위와 공적만을 신뢰하고 교만하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선한 행위와 공적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보답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게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한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만이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