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깊은 산 속에 아주 맑은 샘물이 있었다. 인적의 흔적이 없는 아주 고요하고 깨끗한 샘이었다. 나르시스는 사냥을 하다가 이 샘을 찾게 되었다 갈증을 채우기 위해 나르시스가 그 샘물에 엎드렸을 때 물 속에 미모의 소년과 눈이 마주친다. 물위의 그 영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몰랐던 나르시스는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려고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잡아보면 구름이었다. 여러 번 반복을 시도하다가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너무도 아름다워 다른 것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그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다 상사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물의 요정들이 나르시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찾았지만 샘물가에 수선화 한송이만 피어 있을 뿐이었다. 나르시시즘이란 이렇게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기 자신을 탐닉하고 자신과 대면하는 것,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는 욕구, 여기에서 멈춰서는 것으로는 자신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도무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일 지라도 자신에게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출산이다. 그는 자녀를 통해서만 자기를 버릴 수 있다. 자녀가 자신의 분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시적인 나르시시즘에서 나올 수 있는 최초의 단계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모순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타자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에 빠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최면의 빠진 상태처럼 자신을 잊는 계기가 된다. 또한 사랑을 통해서 자신을 잊어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열정을 얻을 수 있다. 나를 지키려 하고 나를 상실하지 않으려는 노고는 삶을 허망하게 만든다.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나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잠수를 탈 수 있지만 결국 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골방에서 나와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이것이 바로 나야 하고 만지고 다듬고 보듬어 보아야 그것은 환영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속에서만 나를 볼 수 있게 그렇게 피조되었다.
이 뿐 아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를 반성하려고 하는 것, 나 자신을 너무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것도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 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 그리고 품위있는 이 모습이 병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한 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요동이 없고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고 자기 고양을 이루는 그 이면에는 나르시시즘이 숨어 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이것은 자기에서 쫓겨나온 것과 같은 무엇일 수 있다. 자기로부터 쫓겨난 우리의 과제는 평생 자기를 찾는 것이다. 자기가 없어 불안에 떠는 존재, 그러면서도 자기를 찾으면 찾을 수록 더 불안에 떨어야 하는 존재, 그러나 자기를 내어주고 자유를 포기할 때 오히려 자기를 찾고 자기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피조물이다. 때로 나를 버리고 낮아지고 겸손을 유지할 때만 우리는 나를 만날 수 있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나친 자기 반성은 병이 될 수 있다.
글ㅣ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