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메이커가 말하는 부흥, “난 도구일 뿐”

벤추라감리교회 최상훈 목사 인터뷰

남가주 지역의 고도시(古都市) 벤추라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상훈 목사가 처음 벤추라감리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회를 지키고 있던 성도들은 30여명 뿐이었다. 벤추라 시가 속한 벤추라 카운티 전체를 통틀어야 한인이 4천명 밖에 안되니 사실 이 넓은 지역에서 교회 규모가 작은 것은 어떤 의미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워낙 오래된 도시라 새로 유입되는 한인 인구도 없고 한인마켓, 한인식당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최 목사가 부임한 후 6개월만에 새가족이 70여명 늘어났고 2년이 된 지금 성도수는 150명이 됐다. 굳이 계산하면 2년만에 5배나 부흥한 셈이다. 남가주에서도 한인이 적기로 소문난 벤추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이야기를 들어 본다.

최상훈 담임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 관악구 예광감리교회를 1975년 개척해 대형교회로 성장시키고 2010년 은퇴한 최덕순 목사다.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가 된 그는 감신대를 졸업한 후 연세대대학원에서 교회음악과 협성대 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동시에 공부하며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 감리교단의 존경받는 원로로 통하는 아버지 최덕순 목사 덕에 앞길이 탄탄한 목회를 했을까? 물론 아버지의 목회를 바로 옆에서 지켜 보고 또 함께 하며 은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목회의 기초를 탄탄히 배웠다. 그러나 실제 목회에서는 달랐다. 그는 어려운 곳만 골라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 소명을 받았던 것 같다.

예광교회에서 20명 밖에 안되던 중고등부를 맡았을 때에는 고3들에게도 주일성수는 기본에 토요예배까지 철칙으로 내세워 부모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5년만에 220명으로 부흥하며 거의 전원이 대학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부흥이 된 후에는 돌연 그곳을 떠나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난지도로 가서 입대 전까지 사역을 했다. 물론 사례비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제대 후 선교사로 헌신해 아프리카 우간다와 케냐에서 선교하며 맨땅에 교회 개척을 했고 수단 지역의 피난민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프리카 선교 사역 후 안식년을 준비하다 알래스카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가장 더운 적도 지방에서 가장 추운 동토의 땅으로 간 그는 알래스카 최초의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인 알래스카예광감리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크게 부흥시켜 아름다운 성전까지 완공했다. 그러나 성전을 입당하던 그날 성도들에겐 충격적인 사임을 발표하고 벤추라감리교회로 부임해 다시 바닥부터 목회를 해 오고 있다.

 

▲미국 벤추라감리교회 최상훈 목사.
-벤추라감리교회가 뜨겁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인이 극히 적습니다. 그래서 한 장로님은 이곳의 1백명 부흥은 한국의 1천명과 같다고 합니다. 한 해에 한 영혼을 찾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지를 만들어도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임한지 한 해만에 교회는 3배 이상 부흥했고 통계로 보면 거의 매주 새신자가 왔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잘했거나 뛰어나서 교회가 부흥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흥의 비결은 오직 성령님의 일하심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과 인간이 하는 것은 처음에는 비슷할 수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곧 한계를 드러내며 큰 차이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교회가 많은 변화를 주어야 하겠지만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성령 운동, 기도 운동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묻기를 ‘요즘 시대의 목회 트렌드가 무엇이냐’고 합니다. 저는 큰 그림을 그리면 두 가지로 봅니다. ‘사랑을 기반으로 한 소통과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오히려 더 원색적인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통은 목회자와 성도간의 막힌 담을 겉모습만이 아닌 속사람으로부터 진실하게 허무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핵심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는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는 일입니다. 요즘은 진보가 대우받고 보수는 마치 수구꼴통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이 정확히 선포될 때만이 제대로 된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성령 운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가요?

 

▲벤추라감리교회의 예배 모습.
“저희 교회는 바쁩니다. 예배도 그냥 드리지 않습니다. 주일예배 전에는 주일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회가 따로 있습니다. 수요예배 전에도 중보기도회가 있습니다. 중보기도 없이는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특별새벽기도회, 토요치유새벽기도회 등이 열립니다. 주님과 교제가 많아질수록 비례하여 주님이 더 많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토요기도회 때는 고질병이 고쳐져서 간증도 하고 방언도 받고 쓰러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런 일이 늘상 일어나니 교인들도 낯설어 하지 않습니다.

 

특히 아시다시피 한인들은 이민생활에 상처가 많고 영적 갈급함이 큽니다. 그래서 토요기도회 때에는 우리 교회 성도뿐 아니라 주변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전심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신비주의자가 아니고 그것을 지향하지도 않습니다. 특출난 부흥사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십년간 앓던 병이 안수기도 중에 치유되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적 가운데에 오직 주님이 드러나는 것이 마땅하기에 목회자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철저히 가르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은 자신이 원하시는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목사님이 그동안 목회한 곳은 아프리카나 알래스카 등, 소위 선호될만한 지역은 아니었는데요.

“적도 지역에서 6년, 알래스카에서 7년간 목회와 선교를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결정은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에 지체하지 않고 제가 순종한 것뿐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7개 교회를 개척했고 고아원 사역을 했으며 알래스카에서는 7년간 목회하며 3층짜리 성전도 건축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모든 사역은 제가 이룬 것은 티끌만큼도 없고 오직 주님이 하셨습니다. 성령이 일하시기만 하면 기적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성전 건축까지 하시며 기반을 잡았는데 벤추라로는 왜 오셨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성도들도 정말 격렬할 정도로 말렸습니다. 7년간 고생하며 성전을 다 짓고 입당까지 하는 너무 감격적인 날 저는 눈물의 사임 발표를 했습니다. 개척한 이후, 그 지역에서 세번째로 큰 교회로 부흥된 상태였고 이제 좀 편해지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너무나 분명한 주의 응답을 받은 상태였고 제 영적 멘토이신 목사님과 여러 선배들께서 제 사역에 동일한 응답을 받으신 상태였기에 주저할 수 없었습니다. 실은 6년간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뉴질랜드에서 1년 안식년을 보내려고 뉴질랜드 비자도 다 받고 답사도 다녀와 살 집도 계약을 마치면서 ‘이제야 드디어 양떼가 뛰노는 이 천국 같은 곳에서 좀 쉬나 보다’ 했는데, 떠나기 3주 전에 알래스카로 소명을 받았지요. 정말 눈물을 흘리며 떠났던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부임 전 벤추라감리교회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오셔서 처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두 주간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며 준비했습니다. 저는 ‘성령이 마음껏 일하실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먼저는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터전만 닦았습니다. 그리고 성도 간에 소통의 장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것 두가지 외에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시니 일상적인 예배가 아니라 매주 성령이 임재하는 부흥예배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한주 은혜로운 것이 아니라 매주 성도들이 눈물과 회개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치유가 일어나기도 하였고 결석자를 위하여 수십장씩 만든 설교CD가 나오면 순식간에 남는 것이 동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지만 사실은 전부 다 저를 향한 말씀입니다. 설교를 들어야 할 대상은 성도가 아닌 바로 저부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혼자 다시 듣고 또 듣고 눈물로 회개하고 차 안에서도 부족한 나를 보며 엉엉 운 적도 많습니다.

설교란 단순히 좀 감동을 주거나, 혹은 성도들에게 독특하고 탁월한 성서적 해석을 전할 때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생명력’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할 때는 내가 놀랄 정도로 단어 하나하나가 생명을 가진 것처럼 전율이 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지시는 것을 모두가 함께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역사가 실제가 되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중보기도를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첫 목회는 예광교회 고등부였습니다. 학생이 20여명 되던 때에 사역을 맡았고 5년만에 220명으로 부흥했는데 그 중 60%가 고3이었습니다. 본교회 주일 성수는 기본이었고 토요일 예배도 반드시 참석하게 했습니다. 일년에 4-5차례 전도주일을 준비할 때는 일주일동안 하루 6시간씩 교회에서 중보기도하며 준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2명 빼고 모두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 기독교 잡지에서 취재도 왔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세상에 믿는 자가 본을 보여야 한다.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함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지금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목사, 선교사, 리더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명문대학에서 가르치는 제자도 있고 미국으로 유학 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제자도 있습니다. 이들 중 ‘카타콤 기도실’이라는 기도 지원대를 만들어 지금도 제 사역을 중보기도 해 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내일 새벽에 중요한 집회가 있다’고 페이스북 기도실에 띄우면 이들은 모두 동일한 시간에 기도해 줍니다. 제가 특별안수기도를 할 때도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십명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기에 믿음이 생깁니다 아프리카 선교도중 총기 강도 등을 만난 급박한 위기 상황에도 주님이 보호하셨을 때, 나중에 그들이 보았던 꿈과 환상이 일치하는 등 놀라운 간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주일, 수요예배 전 예배를 위해 중보기도회를 합니다. 중요한 행사 전에는 사역자 모두가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분명한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최덕순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으시죠?

“가장 큰 영향은 아버지의 목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의 삶과 강단에서의 말씀이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제 아버지이지만 ‘정말 도대체 이런 분이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목회자도 사실 사람입니다. 교회에서야 거룩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집에서는 좀 다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밖에서나 안에서나 정말 진실하시고 한결같으십니다. 새벽에 제가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고 나올 때면, 아버지가 마루에서 무릎을 꿇고 밤새 기도하고 계신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가정 예배를 드릴 때에도 늘 주님을 최우선에 두셨고 돈을 쓰실 때에도 주님을 최우선에 두고 결정하셨습니다. 제가 아프리카로 가는 힘든 결정을 할 때도 오히려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한국에 안주하지 말고 당연히 가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저 역시 아버지처럼,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 아내가 집에서 보는 저의 모습과 교회에서 성도들이 보는 저의 모습’이 동일한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목회자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결국 성도들에겐 그 진실이 통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은 눈물이 나오게 합니다.”

-대학청년 사역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지요?

“저는 Camp of God(COG) 청년 대학생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CTS기독교방송의 청년 독수리 프로그램으로 유명하신 김형민 목사님이 시작한 사역으로 각 지역의 대학 캠퍼스에 말씀을 전하고 제자를 양육하는 사역입니다. 제가 알래스카에 있을 때에도 알라스카주립대학교 안에서 COG 사역을 했고 이곳 벤추라에 와서도 이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벤추라칼리지, 옥스나드칼리지, UC산타바바라 등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남가주 전체지역의 성령의 불씨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번에 벤추라카운티교역자협의회 회장이 되셨습니다. 벤추라 지역의 교회 연합 상황은 어떠한가요?

“지난해부터 교회 연합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연합회가 잘 되려면 주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한몸임을 인식하고 서로를 겸손히 존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같은 아군입니다. 그러므로 아군끼리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합쳐서 이단, 사이비, 안티기독교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반면 내적으로는 서로가 진실한 마음으로 동역하면,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고 거룩한 영적 전이가 이루어져 교회가 함께 성장하고 은혜받는 그런 연합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벤추라 지역은 성탄연합예배, 부활절연합예배를 주요한 행사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매달 이 지역 목회자들이 모여서 월례회를 드리면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교단과 교파가 각각 다르지만 벤추라 지역의 부흥을 위해 뜻을 모으고 있기에 매우 고무적입니다.”

-목사님은 교회 음악을 공부하신 것이 독특한 이력 중 하나인데, 문화 사역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 예빛선교단을 만들어 뮤지컬을 열고 각종 자작곡을 발표하는 등 활동했습니다. 후에는 ‘화요 쉼터’라는 크리스천 콘서트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청소년들이 세상 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이보다 더 나은 기독교 문화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매주 화요일마다 화요 쉼터라는 콘서트 형식의 토크쇼를 열었습니다. 아침, 창문, 최덕신, 최인혁, 박종호, 김수지, 꿈이있는자유 등 그 당시 유명한 CCM 가수 중에 이곳을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었고 나중에는 사회 저명 인사들, 국회의원, 국무총리까지 초청해 청소년들과 기독교적 비전을 나누는 자리로 발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극동방송에서 그 공로로 ‘한국 교회음악에 공헌한 70인’에 저를 선정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저 저는 통로로 사용받은 것 뿐인데 너무 과분한 평가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처럼 늘 겸손히 굴복하고 낮은 자세로 주님이 부르신 곳이 어떤 상황이든 주님을 높이고 순종하는 것이 저의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벤추라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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