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선교신문 이지희 기자] 인도는 12억 인구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미래 신흥경제강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뿐 아니다. 인도는 향후 세계선교를 위해서도 중국과 함께 새롭게 일어나는 국가로 주목받고 있다. 기독교 인구는 2.3%에 불과하지만, 수는 2,800만 명에 달해 한국 기독교 인구보다 훨씬 많다. 2013년 인도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1만여 명으로, 선교사 파송 세계 9위를 차지했다. 인도 내 타문화권, 혹은 동일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국인 선교사(국내 전도자)도 7만 5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에는 무슬림도 많다.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무슬림이 많으며, 이는 중동 전체 이슬람 인구보다도 많다.
인도에서 한인 선교사가 사역을 시작한 지 벌써 33년이 되었다. 1982년 김영자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딘 이후, 인도는 동북아 X국, 미국, 필리핀, 일본과 함께 한국교회 주요 선교사 파송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80여 사역단체가 파송한 1,100여 명의 한국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특히 1995년 인도 전 지역의 한인 선교사들의 친목과 협력을 위해 전인도 선교사협의회(전선협)가 구성되고, 2006년에는 전선협이 인도 내 가장 큰 선교사협의단체인 인도 선교협의회(IMA)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도 선교 1세대를 지나 2세대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지난 33년의 사역을 돌아보고, 향후 성숙한 인도 선교 방안을 파송교회와 선교단체, 선교사가 함께 모여 논의하는 '인도 선교 2015 전략포럼'이 10일 오륜교회(김은호 목사)에서 열렸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와 전선협이 공동 주최한 이번 포럼에는 1백여 명의 인도 선교사, 지역교회 목회자, 선교사 후보생, 후원자 등이 참여해 관심이 뜨거웠다. 행사는 1부 인도 선교 현황에 대한 동영상 보고, 인도UBS신학대 교수이며 전선협 연구위원장인 진기영 선교사의 주제발제, 2부 패널토의, 3부 '인도 선교 매뉴얼' 출판 기념회로 진행됐다.
한인 선교사가 인도 선교에 끼친 영향
이날 진기영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인도 선교 33년과 다음 세대의 과제'에 대한 주제발제에서 "인도 선교가 전환기를 맞아, 개척자 세대인 1세대의 업적과 시행착오의 유산을 모두 이어받은 2세대는 더욱 성숙한 선교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것"이라며 "인도 선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도인에게 맞는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방식, 선교 전략을 찾아낸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인도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1세대 한인 선교사가 인도 선교에 기여한 공적을 소개했으며, 이후 역사적 관점, 커뮤니케이션 관점, 선교 전략적 관점에서 인도 선교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했다.
진기영 선교사는 이날 "길게는 2천 년, 짧게는 3백 년가량의 근대 개신교회의 인도 선교 역사와 비교해 33년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는 미미하다"며 "그러나 한인 선교를 접촉하고 경험한 인도 기독교인들로부터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산발적이고 부분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 선교 3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한국교회 인도 선교 백서', 'PCK 인도 선교 30주년 회고와 전망'의 내용을 인용해 한국 선교사가 인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으로 ▲인도인 목회자 훈련을 통해 수천 개 교회를 개척, 수많은 인도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고 ▲가는 곳마다 문맹퇴치, 긍휼, 학교, 사회개발 사역 등 가난하고 학대당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했으며 그들의 경제적 자립 및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말했다. 또 ▲성경공부, 제자훈련, 기도운동 등 한국적 영성으로 인도교회의 건강한 발전과 성숙에 기여하고 ▲친절, 섬김, 희생과 나누는 삶을 증거했으며 ▲전선협을 중심으로 한인 선교사간 동역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도교회 및 선교단체와 협력해 현지인과 협력하는 파트너십 선교의 단초를 열었다고 말했다.
인도 선교를 위한 역사적 관점
진기영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인도 선교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문제를 인정하면서 다음 세대의 선교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바람직한 선교'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 기준, 인도의 역사와 문화적 상황에 기초한 내부자적 기준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인도의 복잡·다양성과 지역적 상황도 고려하지 않는다면 효과적인 인도 선교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도 선교 2천 년 역사는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카빠드에 도착해 포르투갈 선교가 시작된 1500년을 기점으로, 이전의 '시리아 기독교인 선교'와 이후의 유럽 선교사에 의한 '근대 선교'의 두 시기로 나뉜다. 그는 근대 선교 역사에서도 포르투갈 모델, 독일 모델, 영국식 모델을 소개하며 "이 중 사역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경 말씀을 우선 가르치고, 건물, 기관을 세우기보다 사람을 기른 독일식 선교 방식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포르투갈의 인도 선교=1510년 군사적으로 고아 지역을 복속시키고 이후 다만, 디우, 뭄바이, 코친 등으로 지배권을 확대했다. 가톨릭 신앙을 보급하고 포르투갈 교구를 세울 특허권을 획득해 식민정부 차원에서 포교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진기영 선교사는 "가톨릭 선교의 긍정적 결과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에서 나왔고, 그 중 로버트 드 노빌리 선교사가 있다"고 말했다. 노빌리 선교사는 6년 만에 26명의 브라만 카스트를 포함, 600명의 상층 카스트 회중을 얻었고 하층 카스트에서도 1,600여 명의 세례 신자를 얻었다.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은 인도인들처럼 고기 대신 채소만 먹으며 인도 종교 교사의 옷을 입고, 그들이 하던 구걸생활, 인도 사회 관습을 철저히 지키며 성육신적 선교 모델을 보였다. 상층 카스트 선교를 위해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 지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현지 신앙과 문화를 계속 연구했으며, 개종자들이 기독교인이 돼도 인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버리거나 인도 사회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왔다. 또 우상숭배를 제외한 현지 습관, 문화를 존중해 문화의 장벽을 낮췄다.
하지만 포르투갈 선교는 영국 선교와 함께 인도 주류 사회에 비판받는 강압에 의한 개종 모델을 남겨 기독교는 '침략자의 종교', '반민족주의자, 매국노'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또 개종 장려를 위해 쌀과 일자리를 제공해 '쌀 신자'라는 명칭을 얻었고, 인도가 금기시하는 술과 고기를 장려하며 포르투갈식으로 이름을 변경하는 등 포르투갈인의 삶의 방식을 강요해 소위 '파랑기'(Parangis·천한 외국인) 문화를 인도에 보급했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 기독교는 '부정한 종교', '전통 문화를 파괴하는 종교'라는 오명을 가졌다.
독일의 인도 선교=1706년 남인도 트랑크바에서 사역을 시작한 인도 최초 개신교 선교사 바르돌로마우스 지겐발크, 하인리히 플륏샤우와 그 후 1840년까지 79명의 트랑크바 선교사들은 바람직한 인도 선교 모델을 남겼다. 진 선교사는 "트랑크바 선교가 21세기와 향후 인도 선교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데 집중해 높은 계급의 힌두학자든, 천민이든 견고한 기독교 신앙을 갖게 했으며, 공동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기르는 일에 집중해 많은 제자를 양육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독일 모델은 처음부터 '동역자',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훈련과정을 거친 후 현지인 목사와 선교사로 세우는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했고, 언어 숙달과 문화 연구에 적극적이며 현지 문화를 고려하는 사역을 했다. 지겐발크는 인도에 온 지 1년 만에 따밀어로 설교하고 전도책자를 만들고, 2년 만에 2만 단어의 사전, 문법책을 만들었으며, 5년째 인도 사회 연구서, 7년째 인도 신들의 족보 연구서, 8년째 신약성경 번역을 마쳤다. 또 후배 선교사들이 미리 현지어를 습득하고 오도록 해 벤자민, 슈바르쯔 등 트랑크바 선교사는 선교지에 오자마자 현지어 사역을 했다. 진 선교사는 "이들은 선교사로 오기 전 충분히 준비하고, 현지에서도 언어 습득에 힘썼다"며 "이를 통해 시행착오를 줄이고 현지인이 이해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질적, 양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고 말했다.
영국의 인도 선교=윌리암 캐리, 알렉산더 더프 등의 선교 모델은 성경번역의 열정으로 말씀 전파에 큰 공헌을 했으며 전통적인 사회악을 제거하는 사회개혁, 교육, 의료, 사회 개발, 전문화된 팀 사역, 자립선교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더프 선교사는 영국식 고등교육 모델의 창시자로 19세기 인도 기독교 지도자들인 상층 카스트 제자들을 양성해냈다.
진 선교사는 "그럼에도 캐리와 더프의 모델에서 지금도 떨쳐버리기 어려운 부정적인 유산이 있다"며 ▲전형적인 프로젝트 선교로 건물, 기관 운영에 매여 말씀 교육과 사람 세우는 일에 소홀했고 ▲오늘날 다수 선교사와 인도교회가 되풀이하는 '카바디 모델'(분리식 모델·'카바디'는 상대 선수 몸을 터치한 후 집히지 않고 속히 자기 진영으로 돌아오는 게임)로 비성육신적 선교방법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빼내 선교사가 만든 선교기지에 살게 하거나, 기독교 마을을 만들어 살게 하는 것이 '빼어내기식 선교'"라며 "인도같이 공동체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선교의 문을 막히게 하고, 그리스도인은 영향력을 끼칠 공간을 상실하고 만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빼어내기식 선교는 기독교 개종이 천민 공동체, 게토화된 공동체로의 '정체성, 사회적 신분의 이동'을 의미하게 해 비기독교인의 개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캐리와 더프의 선교 모델은 카스트와 인도 전통 문화에 적대적이고, 파괴를 목표로 하는 모델이었다고 말했다.
상층 카스트에서 시작돼 하층 카스트로 내려온 인도 선교
포르투갈 선교 전까지 1500년간 신앙을 지킨 시리아 기독교인은 인도 내 두 번째 계급인 크샤트리아였고, 16세기 가톨릭 선교도 주로 상층 카스트에 초점을 맞춰 이뤄졌다. 18, 19세기 개신교 선교 역시 처음에는 상층 카스트, 엘리트, 대도시 선교에 힘썼으나 상층 카스트 선교의 성공 모델은 19세기 초중반 반의더프 선교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영국식 교육을 원하는 상층 카스트들을 개종자로 얻었으나, 이후 영국식 교육 기관이 늘어나면서 개종자는 급감했다. 영국식 교육을 받고 민족주의, 인권, 평등사상에 눈 뜬 인도 지식인들 가운데 자치, 독립 운동이 시작되고, 힌두교는 자체 르네상스 운동으로 자긍심을 회복하면서 인도인들 안에 지배자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과 반감, 적대감이 발전했다. 이후 상층 카스트에서는 투자만큼 열매가 거의 맺히지 않았다.
그러나 하층 카스트에서 자발적으로 세례를 요청하거나 현지 전도자를 통한 대량 개종 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는 하층민 기독교인이 많아졌다. 당시 상층 배경 출신이 적은 유럽 선교사들도 사회에서 차별당하는 하층민 사역에 마음이 끌렸고, 사역이 쉽고 많은 열매를 맺으면서 하층민 사역에 집중한 것이다. 진 선교사는 "이런 이유로 오늘날은 19세기와 정반대로 인도 기독교인의 95%는 하층민"이라며 "한인 선교사도 대부분 사회적, 경제적 낙후 계층을 위한 사역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하층민에게 접근하는 퍼주기식 사회개발 사역 방법으로는 힌두교의 뿌리가 깊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상층에게 먹히지 않는다"며 "상층민 선교는 상층민의 문화화 신앙을 고려한 성취신학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