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정진오 목사] 이것은 논제 4번을 통해 분명해진다. 인간이 두려움 속에서 해야만 했던 행위를 신뢰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영광을 부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광을 빼앗는 것과 같다. 이것은 모든 행위가 인간의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이는 주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즐기는 것이고, 자신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기 확신을 지닌 자는 전적으로 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있다면, 자기 확신이 없을 것이고, 그런 자는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자다.
두 번째로, 이것은 시편 말씀을 통해 분명해진다: "당신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시 143:2), 그리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시 32:5)등. 이는 분명 "용서 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가 아니다. 이 구절들은 고해와 회개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시편에서 언급된 죄가 "죽음에 이르는 죄"이고, 모든 성자들이 동일한 본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 그 죄들을 위해 탄원하는 것이라면, 성자들의 행위 또한 "죽음에 이르는 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들의 행위들은 겸허한 죄에 대한 고해의 두려움을 통해서 공적 있는 것이 되기에 선한 사역들이다.
세 번째로, 이것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 이것은 성자들의 기도이다. 성자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죄들을 위해 기도하므로 그것이 곧 선한 행위들이 된다. 그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라는 사실은 다음의 구절을 통해 분명해진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이러한 죄들은 용서받지 못한다면, 또는 신실하게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비난 받게 되는 죄라는 점에 주목하라.
네 번째로, 이것은 계시록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부정한 자들은 결코 그곳에(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계 21: 27).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 모든 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다(또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 또한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을 부정하게 만들고, 하늘의 왕국 안에 있을 자리를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논제 7에서 루터는 의로운 자들이 은혜 안에서 행한 사역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때는 치명적인 것이라는 믿는 자들에게 다소 충격적인 견해를 소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의로운 자는 누구이고, 어떤 때 그것은 치명적인 죄가 되는가?
논제 7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세 참회와 회개에 교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앞선 논제 2에서 언급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가톨릭 신학자들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는 도덕적인 덕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이성, 의지, 양심이라는 인간 안에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자연적인 덕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능력도 함께 주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은총을 통해서 주어진다. 은총 안에서 세례를 통해 인간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게 되고, 여기에 기초해서 인간은 초자연적인 덕(주로 믿음, 소망,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세례를 받아 신앙 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은 초자연적 덕을 갖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 죄를 짓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 와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로 구분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죽음에 이르는 죄'는 신성모독이나 거짓 맹세, 살인이나 강도 등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이외에는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이다. '죽음에 이르는 죄'는 오직 신이 아니면 회복 할 수 없는 죄이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회복 가능한 죄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의로운 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는 언제든 자신의 힘으로 회복 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선이든 악을 행한다면, 스스로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루터는 논제 7에서 은총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덕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행위는 언제든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고 자만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아무리 의로운 자의 선한 행위라 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죄일 뿐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루터의 이러한 견해는 마태복음 5:21-28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된다. 여기서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한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만 먹어도 형제를 살인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의 욕망을 행동으로 옳기지 않는 이상 생각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가르쳤던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즉, 어떤 악한 행동을 생각하거나 하고 싶다고 원하는 것도 여전히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행위와 마음 모두를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처럼, 중세 가톨릭 교회는 은총으로 세례를 받은 의로운 자들이 인간의 욕망과 악한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죄가 아니며,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언제든 자신의 힘으로 회복 될 수 있는 가벼운 죄라고 가르쳤다. 논제 7에 대한 부연 설명에서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자기 확신을 갖는 자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자신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의로운 자들의 행위는 보기에 명백하게 선한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해야 하는 치명적인 죄라고 루터는 가르친다. 이어지는 논제 7에 대한 부연 설명에서, 루터는 시편과 주기도문에서 의로운 자들이 심판과 죄를 사해 주기를 하나님께 탄원하는데,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죽음에 이르는 죄'로 여기지 않았다면, 왜 하나님께 죄와 심판을 면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성서에 나오는 의로운 자들 역시 자신의 모든 행위가 '죽음에 이르는 죄'임을 알고 겸손하게 죄를 사해주시기를 고백했다. 덧붙여 하늘나라에는 그 어떤 죄도 있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심판, 죄의 심각성을 외면하려고 한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행위는 '죽음에 이르는 죄'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행위는 언제든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라고 생각한다. 마음 속에 인간적 욕망과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교회에서는 가식의 가면을 쓴 신앙인으로, 세상에서는 자신의 유익만을 쫓는 이중적인 삶의 태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물들어 있다.
논제 7은 이러한 신앙인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다.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세례 받은 신앙인이라 교만하며, 죄에 대한 심각성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교회가 외적인 양적 팽창에만 집중한 나머지 신앙의 본질을 잊은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성찰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