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이종전 교수] 우리나라 정치사(政治史)에서 인사 청문회가 도입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총리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세우는 과정에서 청문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겉으로 볼 때 그 사람 정도라면 청문회에서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겠나 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심각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급기야는 청문회 자체를 열어보지도 못한 채 사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도 있는 현실이니 더 그렇다. 결국 이미 사임을 한 총리나 장관이 유임되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계속되는 것도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은 어쩌면 그만큼 지금까지 국가의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자기관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만을 목표로 살아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지금까지는 목표만 중요했지 과정은 중요하게 여기지 못한 채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 제일주의, 혹은 성공제일주의가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하거나 애써 배제한 채 오직 자신의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그때까지의 과오는 없었던 것처럼 묻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표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목표점에 자신이 설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것은 능력이고 힘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성장해 오는 과정도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일단은 경제적으로 잘 살아야 하겠다는 목적이 모든 것을 간관하거나 우선순위에서 그 목적이 우선의 가치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목적에 방해가 되거나 목적을 향한 속도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악한 것이고, 내지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간과했다. 때로는 그것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것들이 오늘에 와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시간이 지나 이제 조금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발전도상에 있는 우리나라의 현재의 모습인 것 같다. 사회적으로나 지도자들의 개인에 있어서나 지금까지는 돌아보지도 못한 채 달려만 왔는데 돌아보니 국가나 개인이 모두 목적만 중요했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간과해 온 것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는 현상이 청문회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모습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거에는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면서 주변을 살피고 주어진 책임을 다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름 한 시대의 존경 받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당대에는 존경을 받지 못했거나 혹은 그들의 영향력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훗날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고 재평가되는 과정을 통해서 존경을 받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장은 보이는 힘이 있는 곳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영향력은 힘이 있을 때 까지다. 권력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그것은 유한하다. 언제까지 그 힘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영향력이 미치는 것은 그 힘이 있을 때 까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힘이 있는 곳에 모인다. 자신도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름길을 선택한다. 그것을 영광이고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능력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자신만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청문회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어떤 목표가 있다 할지라도 그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간과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목표가 중요하다면 과정도 비례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할지라도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근본이고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근본을 잃거나 부정하면서 이룬 목적은 반칙에 의한 불공정한 성취인 것이다. 이번 청문회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존중할 수 있는 관계와 사회가 될 때 진정한 인간다움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근본과 보편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이에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신앙하는 자세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목적이 자기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인생의 목적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신앙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신앙까지도 하나의 방편을 생각한다면 기독교 신앙조차도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신실하게 세우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요행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한 진리로 믿고, 그 말씀 위에 자신의 인격과 삶을 세워가는 것이다. 그 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글ㅣ이종전 교수(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개혁파신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