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칼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나라

오피니언·칼럼
이수민 기자
▲백석대 채영삼 교수

'하나님의 열심'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초점을 맞추어, 한 개인의 구원론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는 것은 다소 치우침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열심'이란 자주,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의 공의와 자비, 의로 통치하시는 나라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사 9:7; 26:11; 37:32; 겔 5:13; 34-36장; 39:25).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말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것을 개인적 구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하나님의 열심은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의 나라를 회복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시려는 데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열심으로 그의 백성을 살리고 회복하기도 하시지만, 열방 앞에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도 하시고 훼파하기도 하신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위해 공의와 진리를 드높이기 위해, 엘리야나 예후, 혹은 비느하스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도 얼마든지 인정된다(왕 19:10; 열하 10:16; 민 25:11; 또한, 고후 11:2). '하나님의 열심'을 개인적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주권 정도로만 생각하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열심'은 마치 공로주의적인 행위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열심'을 너무 루터란적으로, 개인적 구원을 주도하는 은혜의 통치로만 여긴 결과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의 은혜 안에서 나를 무조건 안심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그의 이름을 향한 열심과 그의 뜻을 향한 헌신에 붙들리게 한다. 만일 '하나님의 열심'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나를 계속적인 나태와 수치를 변명하는 데에 머무르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갖는 하나님 나라의 차원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수동적인 신앙의 '타령'에 머무르게 한다면, 그것은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거듭되는 비참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위로이다. 하지만, 그 비참과 실패가 일상이 되는 것이 신앙이라는 자위(自慰)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참된 능력, 성령의 새롭게 하시며, 이 땅에 심어 놓은 포도나무에서 참 포도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열매로 '세상 열방을 먹이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간과하는 또 다른 비참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열심'이란 오히려, 열방 가운데 높이 들려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의 나라, 그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에 관한 열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동일한 열심으로, 자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일컫는 이 땅에 두신 그의 교회가 맺는 열매에 대하여도 책임을 물으신다.

나의 구원이 중심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그것이 오히려 수단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고 목적인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 구주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하게 된다. 주께서, 그의 온 목숨과 삶을 다 바쳐 기도하셨던 그 열심이 곧 하나님의 열심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와 뜻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열심으로, 그는 기도하셨고 살아내셨던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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