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2015년 을미년(乙未年) 양띠 해가 동 터 올랐습니다. 10간의 갑과 을의 상징색이 청색이어서 '청양(靑羊)의 해'라고도 합니다. 양은 성질이 온순하고 마음이 맑고 인내심이 강하여 번제물로 이만한 짐승이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희생과 속죄의 제물로 드려집니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도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양이 지닌 속성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요 1:29, 10:14). 상형문자인 양(羊)은 아름다움(美), 착함(善), 상서로움(祥)과 뜻이 상통합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가축 가운데 하나인 양의 해를 맞이하여 새해의 염원과 소망을 담아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우리나라가 광복 70주년과 분단 70년을 동시에 맞이하는 역사적인 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광복 70주년과 분단 70년을 생각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큰 분수령과도 같았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자연스레 연상됩니다. 구약성경은 이 사건이 지닌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대하 36:21). 매 7년이면 안식년이고 또 이런 안식년에 완전수인 10번을 곱한 것을 70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황무한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경작을 준비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지에서 고향 땅으로 귀환하여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대망하며 소망을 가지는 기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 단절과 갈등의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2015년이 화해와 평화의 남북한 통일시대를 여는 해가 되기를 염원합니다.
2015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민족적인 염원과 더불어 영적인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도 가지게 됩니다. 개인화, 세속화, 산업화,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너도나도 시간과 돈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면서 현대 문명은 새로운 야만의 상태에 빠져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전해져온 권위와 전통과 신앙을 버리고 이성의 힘과 속도에 기댄 발전을 신봉하면서 현 사회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자신과도 하나 되지 못하는 분열증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범한 시간을 버리고 1초를 10억으로 나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노세컨드'에 기반을 둔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도를 끌어 올리려는 기술의 가속화로 인하여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그 원래 크기의 약 60분의 1로 줄었다고 합니다. 물론 실제 크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빠른 교통과 초고속 통신과 인터넷으로 촘촘히 연결된 세계가 이전과는 달리 훨씬 작게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기술의 가속화와 함께 사회와 문화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변혁을 겪고 있습니다. 변화의 가속도로 치닫는 세상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만, 갈수록 잿빛 환상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방향을 잃은 속도와 발전은 광포와 야만을 초래합니다. 삶의 질은 현격히 떨어지고 심각한 영성의 고갈을 가져 왔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이 있다. 공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 텅 빈 공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그 자리에 대신하여 세상의 온갖 것으로 쏟아 붓고 채우려 듭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인데, 어떻게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채우려 하면 할수록 갈증을 해갈하려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 빈 공간은 더욱 허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현실입니다.
시인 정호승은 <무릎>이라는 시에서 낙타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자세를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 무릎을 꿇고 /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 밤이 깊으면 / 먼저 무릎을 꿇고 /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인간 본연의 적나라한 모습에 직면하게 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를 헤아리는 영성이 고갈된 세상에는 어두움이 점점 깊어갑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의 근원이셨던 주님과 별처럼 세상을 밝혔던 믿음의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세상은 사막과도 같은 현실입니다. 주님 앞에 자꾸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릎을 꿇고 먼 곳을 바라보아야 현실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허히 무릎 꿇고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바라보면서 뚜벅이 걸음으로 갈 수 있는 개인과 교회가 늘어날수록 이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그러한 비전은 공동체 전체를 품어야 합니다. 내 자신과 내 가정과 내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며 품고 기도하며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랄 수 있도록(엡 4:13) 협력하는 정신과 자세가 양의 해인 2015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각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돈과 속도를 신봉하고 신앙을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이 시대가 역설적으로 신앙과 영성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과 비전을 받들어 살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이끌 것입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양과 같이 함께 무리를 지어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나아가는 2015년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를 위해 양이 지닌 희생의 미덕과 함께함이라는 공동체적 정신을 가지고 교회의 무너진 토대를 다시 회복하고 분단의 아픔에 속절없이 고통당하는 민족을 위해 우리 모두가 기도하며 통일을 향해 나가는 해이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글ㅣ이상명 목사(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