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손상웅 목사] 1870년경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한 박태로는 1898년 이후 봉산 상굴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두 동생을 전도하여 장로를 만드는가 하면, 깡패 김익두를 전도하였다는 소문이 날 정도라면 그의 복음 열정은 대단하였다. 1906년에는 한국어공의회 평안노회 대표가 되고, 1911년에는 황해노회에서 장로가 된 것은 그의 신앙행적으로 보아 자연스럽다.
박태로가 1912년에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그 해 6월 30일에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본 노회의 제1호 한인 목사가 되었으며, 그날 재령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윌리엄 헌트(한위렴) 선교사와 함께 동사목회를 시작했다. 당시 재령교회는 천명 좌석의 대형 교회인데다 사립학교까지 운영하는 등 그 시대에서는 앞서가는 교회였다. 한인목회자 1호와 대형교회 목사 등으로 얻은 그의 명예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12년 황해 노회 서기를 역임하면서 지역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 산하 황해도 지역 목회로 그의 사역이 뻗어나갔으니 말이다.
1913년에 중국 산동선교사로 파송된 박태로, 김영훈, 그리고 사병순으로 구성된 산동선교사단은 '한국장로교회 제1호 해외선교사'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산동선교 헌의안을 제출한 노회가 황해노회였고, 산동 선교를 추진한 목사가 황해노회 목사이자 동사목사인 한위렴 목사였고, 선교 부비를 담당하기로 결의한 노회가 황해노회였기 때문에 이러한 황해노회 분위기가 박태로를 선교사로 자연스럽게 몰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형 교회 목사이자 영향력 있는 황해노회 임원인 박태로의 선교사 지망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소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적 지도력을 인정한 총회는 그를 산동선교사단의 선임자로 임명했다.
중국 선교사로 떠나는 박태로 목사를 작별하기 위하여 본 교회 온 교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는 1913년 7월 15일자 예수교 회보 기사를 읽으면서 박태로는 그에 대한 지명도에 연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박태로는 1913년 5월 김찬성과 함께 산동을 방문하여 선교지역을 협의하였고, 동년 11월에 동료가족과 함께 무의촌 래양의 작은 방 하나에 이삿짐을 풀고 곧바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최초의 세례자 3명과 30여 명의 교인은 박태로에게 선교 사역의 열매이자 선교의 기쁨이었다.
1915년 박태로의 몸에 이상이 있더니 다음해 1916년에 가족과 함께 박태로는 서둘러 귀국 길에 올랐다. 사리원에서 치료하던 박태로는 급기야 세브란스 병원을 찾기에 이른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제5회 장로회 총회에서 "어떠한 감사로 보답할꼬"라는 제하로 산동 선교 보고를 하던 박태로는 선교 열정에 불타 있었다.
몸이 완쾌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태로는1917년 총회의 중국 선교사 재파송에 '순종'했다. 산동에서 사역하던 다른 두 선교사가 임지를 떠나는 바람에 비어있던 선교사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였다. 10리 밖에 까지 나온 래양교회 교인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박태로는 선교 2기 사역에 들어섰다. 래양교회가 세례교인 18명에 53명으로 성장하였으니 그에게 선교 사역의 보람이라고 해도 좋겠다.
교회 성장의 쾌거는 잠시였다. 응급 치료를 위하여 긴급하게 귀국할 수 밖에 없었던 박태로는 세 번의 몽혼수술에도 차도가 없더니 1918년 9월 6일 황해도 자택에서 48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했다. 그가 사명을 완수했으니 하늘의 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총회 결의를 무리하게 '순종'한 결과가 아니었다.
선교협의차 산동을 방문하던 1913년 5월 26일에 쓴 박태로의 글은 오늘날 땅끝에서 선교 사역에 묵묵히 충성하는 우직한 선교사에게 잔잔하고 소중한 위로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