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을 말하는 누가복음 2장은 두 가지 그림을 보여준다.
한 그림은 우리가 흔히 보는 유대 베들레헴 마굿간 구유에 뉘신 아기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선물을 손에 든 사람들의 들뜬 모습이다. 이 그림은 성탄절 때마다 교회 장식으로, 성탄 카드에, 그리고 여기저기 곳곳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성탄절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물론 이 그림이 성탄의 본질을 알리는데 있어 중요한 그림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탄절 하면 일반적으로 이 그림을 떠올린다. 아마도 교회 2천년 역사는 이 그림이 성탄절을 말해주는 최고의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일치를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또 하나의 그림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성탄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말해주는 놓쳐서는 안 될 그림이기 때문이다. 믿기로는 하나님은 이 두 번째 그림이 더욱 드러나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름 아닌 한 밤 중 일용직 노동자들인 저 들 밖의 목동들을 중심으로 그려져야 할 그림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천사들이 동반한 광채로 그들이 놀라운 위로로 빛나는 그림이다. 하늘의 한 주의 사자가 찾아와 목자들 곁에 서 있고, 상상 이상의 밝은 빛의 주의 영광이 포근히 그들을 둘러싸며, 천사들이 나타나 그들에게 놀라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장면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수많은 천군 천사들의 찬송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러한 놀라움을 목격하고 친히 체험한 목자들을 중심으로 한 그림이다. 사실 당시 목동들이란 천민 중의 천민으로 좀 도둑 취급을 받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그들에게 알리며 그들과 함께 첫 번째 성탄아침을 맞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들 목동들에겐 인생이란, 고작 밤에 밖에서 양떼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다른 삶이 있음을 너무도 생생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으며, 그들을 구주의 역사적 탄생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초대하셨고, 그들이 정녕 기뻐하는 것을 보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였던 그들과 첫 번째 성탄을 맞기를 원하셨던 거이다. 여기에 예수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코 아기 예수가 경배를 받는 것보다, 그러니까 첫 번째 그림에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은 이 두 번째 그림이 강조되기를 분명히 원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계실 때 여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때 주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말하셨다. 그렇듯 성탄 사건을 향해서도 예수님을 위하여서가 아닌 죄인들을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탄의 그림은 이제 달라져야 하겠다. 천국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 내지는 예수님이 경배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니 경배한다 해도 실지로는 그럴 수 없는 인간의 죄악의 한계 때문에 아기 예수 경배에 촛점을 맞추는 성탄절 보다는, 그 아기 예수의 성탄으로 인해 그 위대한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인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저 들 밖의 목동같은 우리 인생들이 변화를 경험하는 바 그 놀라움에 초점을 맞추는 그림에 우리는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성육신은 죄인들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회는 성탄을 맞으며, 마굿간 구유에 뉘신 아기 예수의 그림과 동시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하늘의 영광과 평화를 캄캄한 이 땅 저 들 밖에서 누리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면 한다. 천군 천사들의 형언할 수 없는 복음과 거룩한 찬송을 온 몸으로 듣고 감격하며, 뜻밖에 초대받아 찬란한 하늘의 영광에 동참하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훤하게 웃는 그 목동들의 모습이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성탄절 그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기는 2015년 한국교회는 일 년 동안에 이 두 번째 그림을 우리가 사는 현장에서 여러 가지 버전으로 그려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