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권 칼럼]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한 보물

칼럼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 1905∼1997)은 37세 때, 죽음만이 유일한 도피처인 것 같은 고문과 기아, 핍박 등 잔학한 인간의 악몽 세계로 3년간 오딧세이(Odyssey) 같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지옥같은 생활은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동북 쪽으로 가는 기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500명의 승객들은 아무도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프랭클이 탄 칸에는 80명이 있었다. 기차 안은 몹시 붐벼 짐꾸러미나 손에 들고 있던 소지품 위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기차는 며칠 밤낮을 계속 여러 도시와 광활한 들길을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이른 아침 마침내 기차가 속도를 늦추며 역에 닿았다. 승객들은 걱정스럽게 창문으로 내다보고 그 곳이 어디인가를 알게 되자 절망 속에 빠져 들었다. 그 곳 이름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흐느껴 울었으나 대부분은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우슈비츠(Auschuwitz)"였다.

날이 밝자 점차 악명높은 나찌 죽음의 수용소의 가시 철망과 감시 탑이 눈에 들어왔다. 프랭클은 연이은 교수대에 시체가 매달린 모습을 상상하였다.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리 나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차차 그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공포에 익숙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해가 1942년, 빅터 프랭클은 동족 유태인 600만의 생명을 앗아간 극히 조직적이고 능률적인 살인마의 세계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는 살아 남은 극소수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신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즉 믿어 왔던 모든 것을 엄격히 시험해야 하는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아내가―누이를 제외하고는 가족 전부가―그 대학살에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 남았다. 무엇보다도 프랭클은 저항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문턱에서조차도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하며 시련을 견뎌낸 것이다.

기차 문이 열리고 승객들은 플랫폼으로 나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리고 거칠고 상스럽게 남녀별로 두 줄로 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긴 포로들의 행렬이 서서히 움직여 훌륭하게 제복을 차려 입은 어느 SS(나치비밀 친위대) 대원 앞을 통과했다. 그 사람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손가락으로 왼쪽, 오른쪽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정했다. 처음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점차 줄이 짧아짐에 따라 대부분은 왼쪽으로 보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랭클의 차례가 되었을 때 SS대원은 제법 오래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가와 프랭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아주 천천히 그를 오른쪽으로 돌려놓았다. 그 날 저녁 프랭클은 얼마간 수용소에 있었던 포로 한 사람에게 왼쪽으로 보내진 친구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저 쪽에서 그를 볼 수 있을 거요"라고 대답하면서 불꽃이 튀어오르고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높다란 굴뚝을 가리켰다. 프랭클의 동료 중 90%인 1,300여명이 정오 전에 이미 처형당했다.

나머지 포로들은 소지품―의복, 보석, 공책 등 모두를 압수당했다. 프랭클은 첫 저서로 출간할 초고를 지니고 있었는데 결사적으로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전생애의 연구 결과가 그 원고 뭉치 속에 들어 있었다. 당황하여 작은 소리로 한 늙은 동료 수감자에게 그 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 사람은 씩―조롱조로 비웃는 듯한 모욕적인 웃음을 지으며 "제기랄"하고 내뱉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평범한 진리를 보게 되었고, 내 심리적 반작용의 첫 단계로서 전환점이 온 것을 알았고, 이전의 나의 생활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그 원고는 프랭클에게 있어서 영혼의 분신이었고 이것을 잃어버리는 비극 앞에서 삶이란 의미가 있는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 질문에 대해서 한 시간 내에 답을 얻었다. 그에게 입으라고 준 한 죽은 수감자의 옷에 달린 주머니 속에서 히브리 기도서의 찢어진 조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쉐마 이스라엘(Shema Yisrael)의 다음과 같은 기도 내용이었다. "진심으로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너의 주를 사랑하라." 프랭클은 다른 의미로도 해석했다. 그는 이것을 "고통이나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삶을 긍정하라는 명령" 으로 받아 들였다. 프랭클은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가 오로지 원고가 출판되느냐 못되느냐에 달려 있다면 진정 그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생에는 보다 큰 의미가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시기에 거기서 발견한 종이 조각 하나가 프랭클에게는 잃어버린 원고보다도 귀중하였다. 그 기도문은 단순히 종이 위에 쓰여져 있는 문구가 아니라 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강제 수용소라는 혹독한 실험실에서 검증하게 만든 일종의 "상징적 소명(召命)"이었다.

프랭클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간에 인간은 자기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으로부터 알아내고 수용소에서 돌아왔다. 우리는 가장 음울한 시기에도 영적(靈的) 자유와, 독립성을 보존할 수가 있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를 제외하고는 가치를 두고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그 자유란 어떤 태도나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을 선택할 자유 그리고 자기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영적(靈的) 자유의 이런 요소들은 우리에게서 박탈할 수 없는 것이며 삶에 의미와 목적을 갖게 하므로 그것 없이는 우리가 살아 남아야 할 이유도 없다. 프랭클은 니체(Friedrich W. Nietzsche)를 인용하여 이 견해를 피력했다.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인간의 실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프랭클은 고통과 죽음을 포함하여 모든 상황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예비 시체로 있는 동안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 있다해도,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을때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글ㅣ안인권 목사(새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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